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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윤용의 ‘협롱채춘(挾籠採春)’

기자명 손태호

희망을 담아 봄을 캐는 호미 든 아낙

공재 윤두서 손자로 남종문인화풍 이어받은 윤용의 작품
땅위로 올라오는 봄나물 빈궁한 삶 지탱해줄 귀한 식재료
삶 아무리 빈궁해도 가족 지켜낸 조선여인 당당함 엿보여

윤용 作 ‘협롱채춘’, 종이에 수묵, 21.2×27.5cm, 간송미술관.
윤용 作 ‘협롱채춘’, 종이에 수묵, 21.2×27.5cm, 간송미술관.

봄의 절정기입니다. 봄이 오면 벚꽃이나 개나리 같은 봄꽃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올해는 그런 소박한 호사마저 누릴 수 없지만 봄에는 꽃구경을 제일로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봄꽃을 감상해야 진정한 봄을 맞는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봄을 꽃으로 느끼기보다는 봄나물을 통해 더욱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겨울 내내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나온 강인한 생명력의 봄나물을 먹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다는 느낌이듭니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는 직접 담근 된장에 쑥을 넣어 만든 쑥국을 끓여주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냉이나물과 고들빼기김치도 빼놓을 수 없죠. 봄나물들은 모두 강인한 생명력을 품은 먹거리들이니 건강에는 두말할 것 없습니다. 사찰에서도 쑥부쟁이나물, 소리쟁이나물, 민들레나물, 참가죽나물 등이 등장하는 시기죠. 동안거를 끝나고 왕성히 활동할 때 이런 봄나물이 원기를 향상시키고 면역력도 높입니다. 산과 들에서 파릇한 나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바로 윤용(尹愹, 1708~1740)의 ‘협롱채춘(挾籠採春)’입니다.

그림의 제목인 ‘협롱채춘’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에서 붙인 이름으로 풀이하면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입니다. 그림은 배경 없이 하단에만 그려져 있어 혹시 그리다 중단된 작품이 아닌가 의문이 들지만, 낙관까지 찍은 것으로 보아 이것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화면 아래에 오직 뒷모습의 여인 한명만 있을 뿐입니다. 여인은 선채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흰 누비수건을 쓰고 뒤를 단단히 묶었습니다. 수건 아래로 머리카락이 살짝 보입니다. 왼손에는 농기구를 들고 오른쪽 어깨로는 망태기를 끼고 서있습니다. 농기구는 언뜻 보면 날이 선 낫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호미입니다. 도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호미보다 목이 길어 호미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림처럼 목이 긴 호미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최근에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에서 영주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가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 호미도 그림처럼 목이 긴 호미입니다. 외국은 아파트보다는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많이 살고 있는데 정원을 꾸미는 일반적인 도구가 고작 꽃삽이었는데 한국의 호미를 사용해본 미국인들은 신세계를 접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경험담을 SNS를 통해 알리면서 ‘어메이징’과 ‘원더풀’을 외쳤습니다.

양 손의 소매를 접어 올렸고 치맛자락은 위로 올려 허리춤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 아래로는 속바지를 입고 있는데 속바지도 무릎 아래까지 올려 단단히 묶었습니다. 종아리의 단단한 근육이 보이고 발은 짚신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그 주위로 파릇파릇한 봄나물이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어느 시골 아낙의 평범한 모습의 풍속화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 18세기를 고려하면 그리 평범한 그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그림의 주인공이 여성 한 명입니다. 조선후기 회화에서 주인공을 여성 단독 샷으로 내세우는 그림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신윤복의 ‘미인도’ 같은 몇몇 작품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중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은 ‘협롱채춘’이 유일합니다.

여인은 나물을 캐다 허리를 세운 채 오른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인은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함께 나온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를 향하고 있을까요? 아님 앞으로 일해야 할 넓은 땅을 보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분명한 것은 화가는 여인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는 점입니다. 머리에 단단히 묶은 수건, 야무지게 들고 있는 날 선 호미, 씩씩한 옷 갖춤, 단단한 종아리 근육 등 어떤 힘겨움도 견뎌내겠다는 당찬 여성의 의지가 300여년이 흐른 지금도 화면 밖으로 뿜어 나오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여성의 삶은 매우 고단하였습니다. 양반은 성리학의 엄격한 잣대로 여성들의 삶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런 사회적 차별에 서민 여성들의 삶은 빈곤까지 더해져 끝없는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시집살이에 빨래, 바느질을 비롯한 가사노동과 많은 제사음식 준비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농사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들밥도 준비해야합니다. 하지만 먹을 것은 늘 부족하기만 합니다. 살림살이가 부족한 형편에 이 계절 땅위에서 올라오는 봄나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소나무껍질도 벗기던 우리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나물을 캐던 중 허리를 펴고 그림처럼 넓은 땅에 펼쳐진 나물들을 바라봅니다. 아직 캐야할 많은 봄나물만큼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힘든 것이 대수겠습니까? 배고픈 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에 들고 있는 호미를 다잡아봅니다. 아낙이 캐는 것은 나물만이 아닙니다. 가족들의 삶과 희망도 함께 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삶이 고단해도 내 아이들만은 지키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릅니다. 그런 모습을 화가는 멀리서 지켜보고 마음에 담아 종이에 그렸습니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선비화가 윤용입니다. 그림 속에 쓰인 ‘군열(君悅)’은 윤용의 자(字)입니다. 윤용은 국보 ‘자화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의 손자이고 아버지 윤덕희도 선비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림 실력은 집안 내력이었으며 남종문인화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 묘사를 중시하는 화풍을 이어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윤두서가 최초로 풍속화를 개척했는데 그런 화풍이 계속 이어졌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윤선도의 증손이지만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윤두서는 당시에 드문 인권옹호주의자였습니다. 가난한 주민들을 구휼하는데 앞장섰고 집안 노비들에게도 이름을 불러주었으며 노비의 자식이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가풍은 윤용에게도 이어져 가난한 농부 여인을 이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윤용은 33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40~50대 절정기 작품을 접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은 “밥 짓고 밥 먹는 일이 가장 으뜸가는 제사”라 했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마음이 괴롭고 살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당신은 무얼 먹고 사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인생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를 먼저 물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좋은 음식으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건강하게 잘 먹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밥이 하늘이고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산과 들에서 자란 건강한 봄나물 등을 통해 우리 스님들, 대중들 모두 건강해지시기를 발원해봅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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