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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무위(無爲)

기자명 현진 스님

인위적인 조작 개입되지 않은 초자연 상태

산스크리트어의 ‘어쌍쓰끄릐따’를
한문번역 과정서 도가 ‘무위’차용
억지없이 이뤄지는 ‘공’ ‘해탈’세계

‘무위(無爲)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혹은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속해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소한 ‘무위(無爲)'라는 개념을 공유하는 범주 안에서도 불교도인가? 유가의 사람인가? 도가의 사람인가?에 따라, 그리고 불교도 안에서도 중국의 시각에서? 아니면 인도의 시각에서? 등에 따라.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금강경’ 제7 무득무설분 말미에 설해진 “성인은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수보리의 대답에 대해서이니,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인도가 출발점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보다 정확한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단어는 ‘금강경’에서 ‘무위’로 번역되는 범어 ‘어쌍쓰끄릐따(asaṁskṛta)’이다. 어쌍쓰끄릐따는 ‘쌍쓰끄릐따(saṁskṛta)’에 부정관사 ‘a­'가 첨부된 것이다. 쌍쓰끄릐따는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에서 어떤 무엇이 절대존재 브라흐만에 의해 완벽히 조절된 상태인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브라흐만이 만들어 인간에게 건넸다는 언어인 ‘산스끄리뜨(saṁskṛta)'도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브라흐만에 의한 완벽한 조절이 결여된 상태를 가리켜 어쌍쓰끄릐따라 일컬은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기반에는 해탈을 성취하지 못한, 브라만교의 표현으로는 ‘브라흐만과 합일(合一)되지 못한’ 채 존재하는 모든 중생(衆生, sattva)들은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 생각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중생상(衆生相)이기도 하다.

브라만교의 유아론(有我論)에 반하는 무아론(無我論)을 기치로 일어난 불교는 당연히 ‘쌍쓰끄릐따(saṁskṛta)'에 대한 개념도 무아론에 맞추어 시각을 달리하였으니, 쌍쓰끄릐따는 어떤 무엇에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된 상태를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완벽을 위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절대존재 브라흐만의 손길이 절대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에선 한낱 미약한 인간의 행위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반해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의 것은 ‘어쌍쓰끄릐따(asaṁskṛta)’라 불리었다. 인연에 의한 연기법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불교에서 어쌍쓰끄릐따는 우리에게 감지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기도 하다.

중국 춘추시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긴 노자가 인간의 억지에 의한 작위(作爲)를 없애고 현실을 외면한 채 은둔과 도피의 철학을 강조한 것이 도가의 무위(無爲)사상이다. 노자의 무위는 자연에 수순하고 조작이 없는 것을 말하므로 무위는 무작위(無作爲)일 뿐 무행위(無行爲)가 아니다. 이에 반해 유가는 도가와 더불어 천도(天道)의 형이상학적인 견지에서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인간 땅에 구현하는 덕(德)의 실천면에서는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에 반하는 인위적인[有爲] 수양과 노력을 강조하였다.

인도 브라만교의 ‘어쌍쓰끄릐따'가 아닌 불교의 ‘어쌍쓰끄릐따'를 한문으로 번역하며 이미 나름대로의 깊은 철학적인 고뇌가 깃들어있는 도가의 ‘무위(無爲)'란 용어를 빌어다 썼다. 일종의 격의불교(格義佛敎)인 셈이다. 우리가 ‘금강경’의 “일체현성개이무위법이유차별(一切賢聖皆以無爲法而有差別)”이란 문구에서 ‘無爲'를 읽을 때 인도 그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어쌍쓰끄릐따'의 의미를 떠올리는지 중국 도가에서 말하는 ‘無爲'의 의미를 떠올리는지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제7 무득무설분의 마지막 “모든 현인이나 성인들은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다”라는 문구는 범어로 “고귀한 이들은 ‘어쌍쓰끄릐따'로써 드러난다”로 되어 있으므로 “해탈로 나아간 고귀한 이들은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적인 상태로 모든 것을 드러낸다”로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이들의 행위는 완벽한 장엄의 상황에서 억지가 없이[無作爲] 이뤄지기 때문에 공(空)이자 해탈(解脫)이요 열반(涅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에 의한 모든 행위는 어떠한 업(業)도 형성하지 않기에 그에 대한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인(道人)으로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35호 / 2020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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