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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복진과 금산사 미륵대불-상

기자명 주수완

수감생활 중 전통문화에 대해 새롭게 인식

300여년 내려운 금산사 미륵대불, 1935년 화재로 손상
본존불 복원 위해 입찰 진행…화승 대 서양조각가 경쟁
일본 유학파 김복진, 철저한 원형 탐구로 불상 제작해

1935년 소실되기 이전금산사 미륵삼존대불 사진(1911년), 1637년 조성 추정.

경주에서 신라 예술의 최고봉이던 석굴암이 조성되고 있을 무렵, 옛 백제 땅 김제 금산사에서는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이 한창이었다. 면모를 일신한 사실상의 창건이나 마찬가지인 불사였다. 이때 미륵불이 율사 앞에 나타나 미륵장육상을 조성할 것을 당부하였고, 그 자리에 연못을 지정하셨다고 한다. 익산 미륵사 역시 연못에서 나타난 미륵삼존을 보고 세워진 사찰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미륵부처님은 이런 연못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 연못을 메워 공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주문이다. 고민하던 진표율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몸이 아픈 곳이 있으면, 이 연못에 숯을 넣고 물로 씻으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소문을 냈다. 그러자 아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숯을 넣는 바람에 금새 연못이 메워졌다고 하는 익살스런 설화도 전한다. 이렇게 연못이 메워진 다음에도 공사에 문제가 있었는데, 미륵장육상을 세우기 위한 석조대좌를 건물지에 올려놓아도 다음날이면 어떤 힘에 의해 석조대좌가 튕겨져 나가있더라는 것이다. 현재 금산사 법당 앞에 뎅그러니 놓인 거대한 석조대좌가 바로 그것이다. 왜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대좌가 거기에 놓여있는지 의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여하간 그래서 더 무거운 무쇠로 대좌를 만들어 올려두니 그제야 버티고 있어서 766년 드디어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장소가 바로 금산사 미륵전이고, 그 안에 봉안된 미륵대불의 아래에 놓인 무쇠솥이 바로 그 쇠로 만든 대좌인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 당시 금산사가 소실되면서 진표율사의 이 미륵장육상도 불타버렸다. 그래서 1637년에 수문(守文) 스님이 금산사를 중창하실 때 이 미륵장육상도 소조불상으로 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불상은 1935년까지 큰 변화없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불상, 특히 본존불이 1935년에 화재로 크게 손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상 아래에 있었던 무쇠솥 대좌는 진표 스님 이후 그대로 전해오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줏돈을 전부 이 무쇠솥 안에 넣었기 때문에 이것을 꺼내는 일을 맡았던 동자승이 촛불을 들고 작업을 하다 화재를 낸 것이라 한다. 1911년도에 찍힌 사진을 보면 1637년에 조성된 원래의 미륵삼존상의 대략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상 좌우 협시보살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여 아마도 부분적으로만 손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미륵대불 아래에 있는 무쇠솥.

아무래도 복원의 핵심은 본존불이었고, 이 재창조에 가까운 불상 복원을 위해 금산사는 입찰 비슷한 방식으로 두 곳에 포트폴리오 제출을 의뢰했다. 하나는 보응 문성(普應 文性)과 금용 일섭(金容 日燮) 등 화승 문중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당시 드물게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조각을 전공한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었다. 일종의 전통과 현대의 대결 구도로 묘사되는 경쟁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경쟁에 의한 입찰 방식이 당시 일반적인 일이었는지, 혹은 새롭게 시도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적은 주최측 금산사가 아직 복원의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 입찰이 김복진 대신 조각승 대 조각승의 구도였을 수도 있을까? 아마 스님들 사이에서는 이런 경우 여러 가지 선례를 따져 누구에게 의뢰할지 적절히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입찰적 경쟁 자체가 아마도 김복진이라는 선례없는 인물, 즉 조각승이 아닌 일반 조각가에게도 기회를 열어주기 위한 포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김복진을 내정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단 제출된 포트폴리오로 냉정하게 평가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금산사의 의사 결정자는 주지였던 성열(成烈), 그리고 불상복원 대시주를 자임한 김수곤(金水坤)이었다. 성열 스님은 그 자신도 화승으로서 문성·일섭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고, 반면 김수곤은 자신의 딸에게 서예를 가르쳤던 서예가 김돈희를 통해 당시 불교근대화에 앞장섰던 박한영, 그리고 이당 김은호 화백 등을 소개받아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복원불사 입찰 심사위원으로 박한영, 김은호 같은 분들이 참여한 것이 흥미롭다. 이들 중 특히 김은호 화백은 이미 김복진과 교유가 있던 관계였기 때문에 결국 대시주 김수곤이 전통적인 불상보다 새로운 불상 조성을 원했고, 그래서 심사에 박한영, 김은호 등을 참여시켜 김복진이라는 서양조각을 전공한 조각가에게 이 일이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
론 주지스님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주지스님도 나름대로는 손을 썼을 것이라 믿는다면, 이 경쟁이 어느 한쪽에만 유리한 공정치 못한 경쟁은 아니었을 것 같다.
 

현재의 금산사 미륵전 미륵삼존대불(본존불 높이 11.82m).

입찰 당시 김복진은 6년여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직후였다. 그는 조각 뿐만 아니라 문학과 연극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동생 김기진과 신극운동인 ‘토월회’를 주도하는 한편,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주도적으로 이끌다 일제의 공산당 검거로 감옥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서양조각가였지만, 감옥에서 먹던 밥을 주물러 불상을 만들다 이를 본 간수가 본격적으로 불상을 만들어볼 것을 권하여 감옥에서 본격적으로 불상을 제작했다고 하니,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뜻밖의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 수감생활 동안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도 더 깊어지고, 더불어 서양미술을 공부한 조각가로서 전통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금산사 불상 복원의 소임은 출소 직후 먹고살 일도 막막했을 김복진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이 일이 반드시 서양조각의 승리라고만 할 수는 없다. 흔히 현재의 금산사 미륵대불에 그의 서양조각적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가 서양조각가였다는 사실이 여기에 그다지 반영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가 평소 조각을 했던 방식과 달리 철저히 원형을 탐구하고, 그에 맞춰 자신을 버리고 불상 자체에 집중했다는 점이 더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이 경쟁을 위해 제출한 일섭 스님(의뢰는 일섭의 스승인 문성 스님에게 했지만, 이후 주도는 일섭 스님이 했다)과 김복진의 포트폴리오가 남아있어 이를 자세히 살펴보고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35호 / 2020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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