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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㊺ 원광(圓光)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⑥

세속오계 다섯 가지 덕목은 당시 청소년들 중시했던 충·신·용(忠信勇) 반영

시대정신 선도하는 사(士) 부류 등장…원광도 이들 부류 출신
‘임신서기석’에는 유교 공부로 새 가치관 추구한 청소년 등장
충·신·용은 국가도 요구한 덕목…진흥왕 수순비에도 잘 드러나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원광은 26대 진평왕 22년(600) 귀국하여 동왕 52년(630) 입적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경전 강론과 호국법회 주관, 정치 자문과 외교문서 작성 등 세속과 출세간을 넘나드는 활약을 하였는데, 다양한 업적 가운데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윤리덕목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덕목의 제시는 당시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게 평가된 사건이었다. ‘삼국사기’권45 귀산전에서 원광의 세속오계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 주었으며,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서도 그 귀산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고 있었음을 보아 후대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인데,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젊었을 때에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군자(士君子)와 더불어 교유하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으면 아마 욕을 당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어진 사람 곁에 나아가서 도를 묻지 아니하려는가?’ 하였다. 이때에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하로 나아가 공손히 아뢰기를, ‘저희들 속사(俗士)가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부디 한 말씀을 내리시어 평생의 계명을 삼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조목이 열 가지이다. 그대들이 남의 신자(臣子)로서는 아마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으로써 할 것(事君以忠),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할 것(事親以孝),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으로써 할 것(交友以信), 넷째는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나지 말 것(臨戰無退),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殺生有擇)이다. 그대들은 이를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상의 자료를 좀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세속오계의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유명한 대목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귀산 같은 젊은 청소년들이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스승을 찾아 평생 지켜야 할 계명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그들이 스승으로 지목한 원광은 원래 신라에서 현학(玄學)과 유학을 공부하였고, 아울러 제가서(諸家書)와 역사서를 섭렵하다가 중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남조 진(陳)에서도 처음에는 유학을 공부하다가 중간에 불교 연구로 방향을 바꾼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원광은 승려였지만 유학과 역사 등에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유교적 입장에서 남의 신하와 자식 된 몸으로 지켜야 할 세속적 가르침으로 다섯 가지의 계를 설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귀산 등과 달리 스승을 찾는 대신에 유교 경전의 공부를 통해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추구하는 청소년들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1934년 경주 석장사터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는 두 청소년의 간절한 맹서문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임신년(壬申年)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서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過失)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가히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먼저 신미년(辛未年) 7월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한다.”

이 자료의 임신년은 진흥왕 13년(552)이나 진평왕 34년(612)으로 추정되므로 원광이 세속오계를 내린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두(吏讀)의 사용이 전연 없는 순수한 우리말식의 한문체로써 맹서한다는 표현을 7번이나 반복한 것이 이색적인데, 내용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충도를 집지할 것을 서약한 것이다. 당시의 두 명의 신라 청소년들이 유교경전을 공부하고, 충성의 덕목을 몸소 실천할 것을 서약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이다. 또한 두 청소년도 귀산과 추앙의 관계와 같은 사우(死友), 또는 맹우(盟友) 관계였던 것으로 보여 신라 청소년들이 국가에 대한 충(忠)과 함께 벗에 대한 신(信)의 덕목을 얼마나 중시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임신서기석’에서 맹서한 두 청소년의 뒤의 행적은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세속오계’의 귀산과 추항은 세속오계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진평왕 24년(602)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교훈에 따라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전투에서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여 결국 충(忠)과 신(信)을 실천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충과 신의 윤리를 실천한 사실은 진흥왕 23년(562) 대가야를 정벌할 때, 큰 전공을 세우고 부상으로 사망한 사다함(斯多含)의 예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불교식의 이름을 가진 사다함은 무관랑(武官郞)과 사우가 되어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심히 애통해 한 나머지 7일 만에 따라 죽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 사다함전에서는 미담으로 전해주고 있다. 이로써 세속오계의 다섯 가지 덕목 가운데서도 당시의 청소년들이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충과 신, 그리고 용(勇)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충・신・용 등의 덕목을 중시한 것은 민간에서 청소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만이 아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왕이 백성들에게 요구한 덕목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흥왕 29년(568)에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수하면서 현지에 세운 ‘마운령비(磨雲嶺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에서는 새로 정복된 지역의 신민(臣民)들에게 이러한 충・신・용의 윤리덕목을 요구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새겨 놓았는데, 중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에 무자(戊子) 가을 8월에 관할 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살펴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일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如有忠信精誠), 재주가 뛰어나 재난의 기미를 살피고(才超察厲),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勇敵强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적이 있는 무리(爲國忠節 有功之徒)에게는 벼슬과 물건을 상으로 더하여 주어 공훈을 표창할 것이다.”

이 순수비에서 한강 유역을 새로 점유하게 된 진흥왕은 ‘서경’을 원용하여 유교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하는 제왕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면서, 또한 ‘논어’ 헌문편(憲問篇)을 인용하여 자신의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修己以安百姓)을 밝히었다. 그리고 반면에 백성들에게는 충・신・용 등의 덕목을 요구하였다. 왕도정치가 국왕이 백성을 대하는 하향적인 덕목이었다면, 충・신・용의 덕목은 신민으로부터 국왕에 대한 상향적인 덕목이었다. 이로써 세속오계 가운데서 당시 신라의 청소년들에게는 특히 충・신・용의 덕목이 중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속오계는 유교와 불교를 겸통한 승려 원광에 의해 종합 정리된 것이며, 유교의 오륜(五倫)이나 불교의 보살십계(菩薩十戒)의 영향을 받은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윤리 문제로 그치지 않고 국가발전기에 처한 6~7세기 즈음의 신라의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주체적인 인물로서 ‘현사(賢士)’ ‘속사(俗士)’ ‘국사(國士)’ 등으로 불려진 ‘사(士)’ 부류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등용되는 ‘중사(重士)’의 풍조를 조성하게 되었다. 진흥왕대의 사다함과 무관랑, 진평왕대의 귀산과 추항, 그리고 임신서기석의 2인(이름 불명) 등도 그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로 분류될 수 있다. 또한 원광도 원래 이들 부류의 출신으로서 처음 유학을 공부하다가 승려가 된 인물로서 귀산 등과의 교감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속오계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는 그 동안 학계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유교나 불교, 또는 유・불・도 3교 조화에서 구하는 등의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학설로써 이병도는 세속오계를 유교의 충・효・신・용・인에 대응되는 것으로 보면서 살생유택의 단서 조항도 6재일(六齋日)을 피하라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예기’와 ‘국어(國語)’에 나오는 규정이고, 6재일을 피하라는 그것 자체도 유교에서 봄 달에 사냥을 금지하는 택시(擇時)와 상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교의 윤리덕목으로 종합 정리된 것은 오륜(五倫)이기 때문에 그것과 세속오계를 비교해 보는 방법도 세속오계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륜의 내용은 부자 사이에는 친함이 있으며(父子有親), 군신 사이에는 의리가 있으며(君臣有義), 부부 사이에는 분별이 있으며(夫婦有別), 장유 사이에는 차례가 있으며(長幼有序), 붕우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朋友有信)는 것 등인데, 오륜이 이렇게 정비된 형태로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맹자(孟子)’이다. 그런데 ‘맹자’는 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당시 신라에서도 유행한 서적 가운데 ‘맹자’가 전연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아서 원광이 직접 읽었는지는 의문이다. ‘맹자’는 맹가(孟軻, 372〜289 B.C.)가 그의 문도들과 함께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한 문제(文帝) 때에 ‘논어’ ‘효경’ ‘이아(爾雅)’와 함께 학관(學官)에 세워져 사박사(四博士)의 하나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 뒤 무제(武帝) 때 사박사가 오경박사(五經博士)로 바뀌면서 ‘맹자’는 제자서(諸子書)의 하나로 격하되어 송대까지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맹자’에서 의리를 강조하면서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심지어 혁명사상을 내세우는 등의 내용 때문에 정치권력으로부터 외면당한 결과였다.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독존적인 지배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는 삭제되는 과정에서 ‘맹자’는 소외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집권의 필요에서 나온 삼강(三綱, 君爲臣綱・父爲子綱・夫爲婦綱)이 오륜을 대체하였다. 이로써 군신・부자・부부 등의 인간관계가 선진유학(先秦儒學)의 수평적・쌍방향적 관계에서 한당유학(漢唐儒學)의 수직적・일방향적 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세속오계와 오륜의 구체적인 내용의 비교작업은 다음 호로 이어질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35호 / 2020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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