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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이한상 거사의 뜻

기자명 이병두

1963년부터 1977년 사이에 ‘불교신문’에 실렸던 법정 스님의 글 68편을 수록한 책 ‘낡은 옷을 벗어라’가 지난해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결같이 ‘주옥같다’는 표현만으로는 그 느낌을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중 몇 편, ‘침묵은 범죄다’ ‘부처님, 이 제자의 목소리를’과 ‘이 혼탁과 부끄러움을…’은 내가 십수 년 전 발굴해서 다른 매체에 게재한 적이 있는데 “법정 스님이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셨다고요?” 하면서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맑고 향기로운’ 스님의 글에만 익숙한 독자에게는 종단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낯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읽어본 글이 많았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서 다시 읽었다. 50~60년 전에 역경(譯經)‧종단 운영 문제 등등과 관련해 스님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 이제라도 ‘좋아졌다’고 평가하며 떳떳하게 머리를 들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한편 종단 수뇌부를 준엄하게 꾸짖는 스님에게 15년 가까이 기관지인 ‘불교신문’에서 원고를 청탁해서 실었다는 점은 놀라웠다. 그만큼 이 신문이 살아있었던 것이고, 이 말은 곧 기관지에 대한 종단 수뇌부의 간섭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니 “법정 스님의 글 같은 종단 비판 글들은 절대로 게재하지 말라”고 간섭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민족해방 이후 비구-대처 갈등과 분쟁으로 ‘싸움 잘 날 없었던 한국 불교계’는 사태를 봉합하여 단일종단 조계종이 출범한 뒤로도 이 ‘싸움 잘 날 없는 역사’를 끝내지 못하고 이어갔다. 종단을 운영할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니 기관지를 창간했어도 발간을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신심 돈독한 불교인으로 풍전산업과 대한전척이라는 당시 국내 최대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기업가 이한상(법명 덕산德山)이 이 곤란한 상황을 뚫고나갈 구원투수로 나타났다.

종단 수뇌부의 설득으로 덕산은 1964년 7월1일부로 신문을 인수하였다(아마 ‘자율 경영’과 ‘종단의 불간섭’이라는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기 위해 인재영입에 나섰다. 서울법대 교수 황산덕이 필화 사건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자 주필로 초빙하여 글을 계속 쓰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시절에, 권력의 눈에 어긋난 인사를 주필로 초빙하려면 큰 용기와 함께 이를 풀어내는 능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담대(膽大)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특히 정부 공사를 많이 하는 사업가로서는 황산덕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산은 박경훈‧서경수 등 쟁쟁한 인물들을 끌어들여 황산덕과 함께, 아니면 그 뒤를 이어 불교신문을 빛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법정 스님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불교신문에 게재하고 주필까지 맡게 된 배경에도 이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특정 종단의 기관지가 이토록 ‘언론 자유’를 구가한 역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종교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드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자부심을 가져도 될 그 역사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고 해서인지, 불교언론의 역사를 말하면서도 이 중요한 덕산 거사의 역할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불교 현대사, 범위를 좁혀서 조계종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덕산의 원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종립학교 문제‧대학생과 군포교 등 젊은 인재 양성‧국제교류…, 어느 한 분야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덕산이 태어난 지 110년, 그가 이역만리 미국에서 이승을 떠나간 지도 40년이 가까워진다. 이제 그분의 은덕에 감사드리고 그 뜻을 다시 살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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