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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A는 A가 아니기에 A라고 한다’-상

기자명 현진 스님

긍정이 부정이요 부정이 긍정인 선의 ‘즉비논리’

금강경 40곳서 반복되는 유형
‘즉비논리’는 선적 논리의 특성
언어로 인해 생기는 오류 줄여

‘금강경’에는 거의 40군데에 이르는 곳에 반복되는 유형의 문장이 하나 있다. 제5분에도 유사형태가 등장하지만, 범어 원문을 기준으로 볼 때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제8 의법출생분에서 시작되니, “여래에 의해 복덕무더기라 언급된 그것은 여래에 의해 복덕무더기가 아니라 언급된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무더기라 이름하고 계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언급된 ‘복덕무더기’를 A로 대체하면 간략하게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A라 한다”라는 다소 의아한 문장구조이다.

‘A’로 언급된 내용은 제5분의 신상[身相, 모습 갖춰짐] 혹은 제8분의 복덕취[福德聚, 복덕무더기]를 시작으로 불법[佛法, 깨달은 법]과 수타원[須陀洹, 흐름에든 자]을 비롯하여 국토장엄, 자체(自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미진(微塵) 등등 및 제31분의 법상[法相, 법이란 생각] 혹은 제32분의 연설[演說, 일러줌]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중생’이란 항목은 제14분과 제17분 및 제21분에 반복되어 언급되어 있는데, 이처럼 반복 언급된 몇 항목을 감안하더라도 적지 않은 내용이 나열되어 있다. 이렇게 동일한 유형의 문장이 언급항목을 바꿔가면서까지 반복된 경우엔 언급된 항목 하나하나의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해당문장의 기본 틀이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강경’의 “佛法은 여래께서 佛法이 아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래에 의해 佛法이라 일컬어진다”라는 문장의 ‘불법즉비불법(佛法卽非佛法,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이란 부분은 선(禪) 논리의 특성인 ‘긍정즉부정·부정즉긍정(肯定卽否定·否定卽肯定, 긍정이 곧 부정이요 부정이 곧 긍정이다)’과 동일하다. 일본의 스즈끼­다이세쯔[鈴木大拙] 박사가 이러한 논증방식을 ‘즉비논리(卽非論理)’라 지칭하며 이를 선경험(禪經驗)의 입장에서 심성론적(心性論的)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즉비논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일반적인 논증방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필요한 내용만을 간단히 살펴본 다음, 다음 회에서 즉비논리와 유사한 전통적 논설방식과 아울러 ‘금강경’에서 즉비논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릴 때 사실적인 언어를 배운 뒤에 나이가 들면 개념적인 언어를 익히게 되는데, 개념적 언어를 듣고는 사실적 언어로 이해하려는 착각의 결과로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발생하게 된다. 어릴 때 배운 ‘어머니’와 ‘집’과 ‘나라’라는 언어는 (나를 낳아준) 우리 엄마와 (내가 사는) 우리 집과 (내가 속한) 우리나라로서 이름은 물론 실체까지 존재하는 유명유실(有名有實)한 사실적인 언어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며 배우는 보편적인 의미이자 개념적 언어로서의 '어머니'와 '집'과 '나라'는 사랑과 편안과 애국이라는 2차적인 개념까지 발생시키며 이름은 있지만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개념적인 언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두 측면에 대한 혼동이 모든 집착을 야기한다.

그래서 한계가 있는 유상(有常)한 고유개념을 한계가 없는 무상(無常)한 보편개념으로 착각하여, 연로하여 돌아가신 나의 어머님을 자식에게 영원히 사랑을 베푸는 보편적인 개념의 어머니로 우리의 뇌리에 간직하기에 여러 애착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실체화 될 수 없는 대상들인 선악이나 영혼·열반·해탈 등의 개념들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어서 절대적인 것으로 구체화될 수 없으며, 또한 멋지다거나 맛있다는 등의 주관적인 사실은 결국 객관화 될 수 없다. 이처럼 사실적 언어와 개념적 언어의 차이라는 보편적인 현상의 자각은 모든 문제에 있어 언어로 인해 발생할 오류를 줄여준다.

형식논리로 즉비논리의 문장을 이해할 때 우리는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흔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중생이 아니다'란 말은 형식논리에 의해 풀이하면 중생이 아닌 보살이나 부처란 의미이다. 그렇지만 그 말이 즉비논리에 근거해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중생 자체에 대한 실체관념을 부정하는 것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전제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것이니, 언어의 보편적인 현상을 자각하고 있다면 중생이란 것은 말로 설명되는 것일 뿐 구체적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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