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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운수사 주지 범일 스님

“욕심 내려놓는 것이 불자의 삶 시작하는 첫 걸음”

금강경·화엄경·법화경은 불교의 가르침 집대성한 세 개의 축
집착 여의고 좋은 생각 연습해 스스로 부처임 깨닫도록 이끌어
중생 삶이라도 욕심 없으면 곧 도임을 가르치는 것이 ‘임제록’ 

오늘부터 ‘임제록(臨濟錄)’을 공부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여파로 두 달 정도 개강이 연기됐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불자님이 함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임제록이 저술된 당나라 시대에는 훌륭한 분이 출가를 많이 해서 불교를 빛내주셨습니다. 특히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 스님의 어록을 모은 임제록은 ‘보배 같은 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임제록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왜 이제야 이 책을 보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했을 만큼 감동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한 선사께서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어서 잿더미가 되더라도 임제록이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할 만큼 찬사를 한 책입니다.

임제록을 공부하기 전에 부처님의 말씀을 먼저 새겨 봅시다. 저는 늘 불교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하나의 축은 ‘금강경’이고 또 하나의 축은 ‘화엄경’입니다. 왜 축이라고 하느냐면 아주 중요한 기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축을 더 추가한다면 ‘법화경’입니다. 참고로 여러분이 매일 독송하시는 ‘반야심경’은 금강경 축에 들어갑니다.

화엄경의 축을 먼저 보겠습니다.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법문은 “일체가 오직 마음의 작용,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수한 마음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서 탄탄한 벽돌로 만들어서 누구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밀어내거나, 싸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공부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자님도 하루에 세 번 자기를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성인의 자격에도 “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포함됩니다.

일체유심조는 늘 좋은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도 연습해서 잘 먹는 것이고, 걷는 것도 연습해서 잘 걷는 것입니다. 저는 한 달 전부터 줄넘기를 시작했습니다. 첫날에는 100개를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는데 한 달이 지나니까 4000개도 가능합니다. 제가 이렇게 줄넘기를 한다고 말씀드리면, 듣는 분들은 아픈 곳이 없는지 물어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아픈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줄넘기를 더 효과적으로 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연구를 해보니, 발뒤꿈치를 들고 하면 충격이 덜합니다. 줄넘기처럼, 좋은 생각도 처음에는 잘 안 됩니다. 하지만 꾸준히 연습하면 좋은 생각도 점점 머릿속을 채워서 일체유심조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도 연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금강경 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보여도 꿈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금강경을 압축해보면 “일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고 그림자이고 번개와 같다.”라는 구절로 귀결됩니다. 또, “나를 형상으로 보거나 소리로 듣는 사람은 삿된 것을 본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고정관념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하면 “보여도 꿈이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법화경 축이 있습니다. 법화경에는 일곱 가지 비유가 유명합니다. 그 비유는 “그대가 원래 부처다.” 이것을 알려줍니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궁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장자, 즉 부자인데 어릴 때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아버지가 시장에서 거지가 된 아들을 발견합니다. “네가 내 아들이다.”라고 하니까 그 아들은 깜짝 놀라서 도망가 버립니다. 중생의 삶이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거지와 같습니다. 그 거지가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가 장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내용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너는 지금 거지의 모습이지만, 원래는 장자의 아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지금은 중생이지만, 원래 부처다.” 우리는 각자가 부처,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이렇게 경전의 세 가지 축을 공부하면, 세월이 흘러 ‘도(道)’가 점점 깊어집니다. 그런데 불자님들은 “도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판단해버립니다. 그 어렵다는 생각 자체가 정말 어렵게 만듭니다. 마조 도일(馬組 道一, 709~788) 선사께서는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하셨습니다. ‘도’는 어떤 외부세계에 오거나, 고도의 수행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을 알면 도의 삶이고 아니면 중생의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도의 삶과 중생의 삶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욕심 있는 것과 욕심 없는 것, 그 차이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중생의 삶이고, 욕심을 조금이라도 줄이면 도의 삶입니다. 태어날 때를 생각해봅시다. 태어날 때는 빈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또 갈 때를 생각해보면 빈손으로 갑니다. 그런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늘 욕심으로 무엇인가를 챙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욕심으로 채워지면 객관적인 사고를 하지 못합니다. 주관적인 이익을 위한 사고를 합니다. 욕심으로 인해서 모든 번뇌가 일어나고 삶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인해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중생의 삶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욕심을 부리거나 빌미를 제공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도가 깊어진다는 것은 다른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번뇌와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욕심을 내고 있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를 닦으면 지혜로워집니다. 그 지혜가 더 확대되어 간다면 삶이 안정적으로 됩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도반이 될 수 있고 가족관계에서도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이것이 ‘평상심이 도’인 삶을 사는 것이고 이것은 곧 욕심을 내려놓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리하면, 금강경 축은 보여도 꿈이다, 그래서 집착하지 말라. 화엄경 축은 일체유심조,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하라, 다 생각대로 마음이 만들어 간다. 그리고 법화경의 축은 그대가 바로 부처다. 이 이야기를 배우고 이해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혹시라도 가까운 사람이 토라지거나, 서로 오해하거나, 주위에서 흉보는 일이 생길 때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소중히 생각한 다음에 어록 공부에 들어가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임제록의 주인공은 임제 스님입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퍼지게 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임제 스님은 3년 동안 선방에서 고요히 그림자처럼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임제 스님이 공부하신 선방에는 요즘 말로 반장 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반장을 맡은 목주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제안합니다. “스님은 공부를 많이 했는데 조실 스님께 가서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임제 스님은 목주 스님이 시키는 대로 조실을 맡고 계신 황벽 스님을 찾아갑니다.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큰스님,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황벽 스님은 다짜고짜 옆에 있던 몽둥이로 임제 스님을 때립니다. 있어 보아야 계속 맞을 것 같으니까 임제 스님은 도망을 나옵니다. ‘나를 왜 때렸는가?’ 임제 스님은 도를 물었는데 왜 맞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주 스님은 임제 스님을 찾아가서 그래도 다시 한번 더 가서 물어보라고 권합니다. 임제 스님은 고민하다가 다시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은 인정사정없이 또 때립니다. 두 번째 맞고 나니 어떻습니까? 속이 뒤집히고 약오르고 이해가 안 됩니다. 이때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렇게 점점 씩씩거리는 강도가 높아집니다. 이 상황에서 목주 스님은 또 한 번 더 권합니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도 있었나 봅니다. 그 말에 임제 스님은 할 수 없이 한 번 더 찾아갑니다. 이번에는 묻기도 전에 때립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어보기도 전에 때리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때 임제 스님이 생각하기를, ‘여기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그래서 떠나려고 합니다.

세 번이나 두들겨 맞은 뒤 떠난다는 것입니다. 목주 스님이 조실 스님에게 “젊은 수좌가 절을 떠난다고 합니다.”라고 하니, 조실 스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네가 아무 곳에나 가라고 하지 말고 대우 스님을 찾아가라고 하라.”라고 알려줍니다. 황벽 스님은 자신이 아는 객관적이고 공부를 잘하는 스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옛날에는 교통수단이 발달 되어 있지 않으니 임제 스님은 걸어서 갑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왜 나를 때렸을꼬?’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 생각으로 보름을 걸어갑니다. 화두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기의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밥 먹을 때도 이뭣고, 잠잘 때도 이뭣고, 일할 때도 이뭣고를 합니다.

임제 스님이 맥이 빠져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을 대우 스님이 발견하고 말을 거십니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누구인데 그리 터벅터벅 걸어오느냐?” 임제 스님이 답을 합니다. “저는 황벽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다짜고짜 저를 때리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하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에 대우 스님이, “이 천치 같은 놈, 황벽 큰스님이 너한테 그토록 자상하게 법문을 일러줬건만 뭐가 어쩌고 어째?” 이 말에 임제 스님은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임제 스님은 불교사에서 최고로 우뚝 선 스님이 되셨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의문을 가진 적이 있으십니까? 공부에 대한 의문, 기도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면 의문은 언젠가는 반드시 풀어집니다. 그 의문이 풀어지면 자유인이 됩니다. 자유인이 되면 생각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예불할 때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이라고 합니다. 양족은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다시, “형상의 세계에서도 원만하시고 정신의 세계에서도 원만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형상의 세계는 색(色)이고, 정신의 세계는 공(空)입니다. 이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물질 이면에는 정신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정한 부처님이라고 하면, 형상의 세계에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하고, 정신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에서도 이치적으로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했어도 욕심이 붙어있으면 형상의 세계에 치우쳐서 속물이 되는 것이고, 또 너무 이론에 치중하면 형이상학이 되어서 정신질환자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늘 잘 조절해야 합니다.

도가 깊어지면,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임제 스님은 세 번이나 맞았는데 대우 스님은 자상한 가르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부터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 세 번이나 맞았는데 이것에 대해서 대우 스님은 자상한 가르침이라고 했는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화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걸어갈 때, 밥 먹을 때도 벽에 부딪혀서 답답한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될 때는 고요한 방에서 명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자는 명상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10분이라도 ‘나는 누구인가?’를 반조(返照)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사중에 일이 많을 때는 지치고 피로가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40분 정도 전화기를 꺼 놓고 방에 들어가 앉으면 신비롭게도 회복이 됩니다.

가을에 떨어지는 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5년 동안 자라서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진 뒤 열매가 맺히고, 그해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바람이 불면 비로소 툭툭 떨어집니다. 불자님들도 평소 자신의 삶을 공부로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어느 날,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바람에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고 생각대로 모두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5월2일 부산 운수사에서 봉행된 ‘불기 2564년 상반기 운수사불교대학 경전학교 개강식’에서 주지 범일 스님이 ‘임제록’을 주제로 설한 첫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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