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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A는 A가 아니기에 A라고 한다’-하

기자명 현진 스님

금강경 즉비논리는 말을 극복하기 위한 것

종교가르침, 언어에 의존하지만
언어로만 본질 표현하기 어려워
언어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헛돼

‘A는 A가 아니기에 A라고 한다’라는 ‘금강경’의 특이한 논조는 중국의 선불교에서 혜능의 대법론과 백장의 삼구론 등을 통해 실수행에 적용되었다. 현대 일본의 선학자인 스즈끼는 불립문자를 기치로 내세우는 선(禪)을 설명하며 이 논증방식을 활용하고 그것을 ‘즉비논리’라 일컬었다. 그는 마음을 절대심(絶對心)과 상대심(相對心) 두 가지로 해석하되 결국 그 둘이 다르지 않음[不二]을 논증하고, 절대적 측면에선 ‘마음이 곧 부처지만[卽心卽佛] 상대적 측면에선 마음이랄 것도 부처랄 것도 없다[非心非佛]’하여 이 둘 또한 다르지 않다[不二]한 것이 바로 즉비논리이다. 이는 ‘금강경’의 논증방식을 대법론과 삼구론에 이어 선학(禪學)의 시각에서 다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육조단경’의 후반부에서 혜능은 10대 제자들에게 자신의 멸도 후 어떻게 설법해야 종지를 잃지 않을 것인가를 일러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방법론이 바로 대법론이다. 대법론이란, 전체를 외경(外境)과 법상(法相) 및 자성(自性)의 세 범주로 나눈 뒤 세부적으로 천・지, 유・무, 장・단 등 총 36쌍에 달하는 대법(對法, 상대적 법칙)을 설정하고 모든 물음이나 의문에 이를 활용하여 대답하게 한 것이다.

예를 들면 누가 “무엇을 일컬어 어둠이라 합니까?”라고 물으면 명・암(明・暗)이란 대법을 적용하여 “밝음은 인(因)이고 어둠은 연(緣)이니, 밝음이 사라진 것이 곧 어둠이다. 밝음으로 어둠을 드러내고 어둠으로 밝음을 드러내니, 오고 감이 서로 인(因)이 되어 중도(中道)의 뜻을 이룬다”고 답하는 방식이다. 이는 곧 말을 할 때 상대적인 것을 찾아서 대법(對法)을 취하여 오고 감이 서로 인(因)이 되게 하다가, 마지막엔 두 법을 모두 없앰으로써 달리 갈 곳이 없게 한다는 것이니, 즉비논리와 유사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백장록’에서 백장은 불조(佛祖)의 가르침인 교설(敎說)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할 때 어떻게 해야 정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그 방법론이 바로 삼구론이다. 삼구론이란, 초선(初善)에서 긍정이나 부정의 한 가지 입장을 지키고, 중선(中善)에서 초선의 입장을 버리며, 후선(後善)에선 초선의 입장을 버렸다는 생각마저도 버리는 방식이다. 이는 ‘보살은 곧 보살이 아니니 이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는 ‘금강경’의 논조와 동일하다.

백장은 교설을 그 의미와 역할 및 표현법에 따라 요의교어(了義敎語)・불요의교어(不了義敎語)와 차어(遮語)・표어(表語) 등 몇 가지로 나누고, 부정을 내세운 ‘차어' 계열은 눈 밝은 수행자들에게 가르치고 긍정을 내세운 ‘표어' 계열은 눈 먼 범부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긍정적인 말은 그 말이 나타내는 의미를 세우는 것이요, 부정적인 말은 그 말이 나타내는 의미를 무너뜨리는 것이기에, 교설의 본질이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침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다는 딜레마에서 선택한, 말을 하되 그 말을 부정하는 법이 삼구론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언어에 의존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 가르침의 본질이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브라만교의 브라흐만을 설명하는 표현에는 ‘아니다(neti)! 아니다(neti)!’를 위시한 부정만 존재할 뿐 긍정의 문구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 단지 부정만하는 것에서 한층 더 발전된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금강경’의 ‘즉비논리'가 그 흐름에서 중요한 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금강경’의 즉비논리에서 ‘A는 곧 A가 아니므로…'라는 부분은 진제(眞諦)를 밝힌 것으로, 그리고  ‘그래서 A라고 한다' 부분은 다시 속제(俗諦)를 드러낸 것으로 보는 등 여러 해석이 있으나, 그 또한 ‘금강경’이 즉비논리를 통해 찾고자 하는 무주상(無住相)의 가르침에 어긋날 뿐이다. ‘금강경’의 즉비논리가 결국엔 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인데 그것을 실수(實修)가 아닌 언어(言語)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헛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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