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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불교 ㊻ 원광(圓光)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⑦

세속오계는 국가‧사회문제에 대한 대답이었으며 신라 시대정신

급속한 국가발전 과정에서 孝보다 忠이 시급한 시대 요구 반영
忠과 信 기본덕목에 勇 첨가…살생유택은 불교자비정신 발현
전쟁영웅 삶서 실제구현…국민윤리로 확대돼 삼국통일 원동력

보물 1411호 임신서기석.
보물 1411호 임신서기석.

이제 원광의 세속오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순서가 되었다. 세속오계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유교나 불교, 또는 유・불・도 3교의 조화에서 구하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사상적 배경을 지적하기에 앞서 고려할 점은 원광의 가르침을 내린 대상자가 남의 신하와 자식 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원광은 가르침을 내리면서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 조목이 열 가지가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 된 몸이니,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세속의 가르침으로 오계가 있다”고 하면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한 것인데, 국가와 가족에 속한 세속인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결코 불교의 출가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광은 유교와 불교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 경전의 사상을 넓게 참조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원광은 유교의 윤리와 불교의 계율, 그리고 출가의 이상과 세속의 현실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때로는 양자의 관계에 대해 불교의 출가 수행자로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진평왕 30년(608) 고구려를 치려는 원병을 수나라에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고,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나, 저(貧道)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글을 지어 바치었다는 사실에서 승려로서의 본분과 유교의 왕토사상, 또는 불교의 이상과 신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원광은 분명히 ‘시경’이나 ‘춘추좌씨전’ 등에 나오는 “천하의 모든 토지와 사람은 왕의 소유이고 신하이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유교의 왕토사상(王土思想)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에 의거하여 걸사표를 지어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세속오계의 사상적 배경이 유교와 불교 어느 것이냐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시되어야 할 점은 그러한 윤리덕목이 당시 신라인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세속오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유교나 불교의 그것을 참조하고 취사선택하여 정리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당시의 국가와 사회의 현실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었으며, 당대 신라의 시대정신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사상적 배경 못지않게 당대 신라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그 윤리덕목의 의미를 해석해 보려고 한다. 

세속오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로써 유교의 오륜(五倫)과 비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륜은 ‘맹자’ 등문공장구상(滕文公章句上)에서 최초로 전해주고 있는데, 원광이 ‘맹자’를 직접 읽고 참고하였을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한당유학에서 ‘맹자’는 제자서(諸子書)의 하나로 격하되어 주목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광이 제자서를 섭렵하였다고 하였지만, ‘맹자’를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륜은 국가・사회・가족의 인간관계를 규정한 유교의 윤리덕목을 종합 정리한 것으로서 후대의 삼강(三綱)과 함께 유교의 대표적인 윤리로 평가되어 왔다. 반면 세속오계는 6~7세기 신라인의 국가정신과 사회윤리를 집약해서 정리해 준 것이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하는 것은 신라인 윤리관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세속오계와 오륜의 덕목을 비교하면, 유사한 내용도 있지만, 차이점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번잡하지만 원광의 세속오계와 유교의 오륜의 덕목 전체를 원문대로 제시하고 차이점을 지적해 보겠다.

세속오계 :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유교오륜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우선 군신과 부자 관계의 충과 효의 덕목 순서가 바뀌었고, 또한 세속오계에서는 부부관계와 형제관계의 가정윤리 덕목을 제외시키는 대신에 오륜에 없는 임전무퇴라는 용과 살생유택이라는 자비의 덕목이 추가되었음이 발견된다. 그리고 오륜에서의 군신・부자의 쌍방향적 관계도 세속오계에서는 일방향적 관계로 변하여 신하의 충과 자식의 효만이 일방적인 의무로 강조되었음이 확인된다. 물론 원광에게 가르침을 청한 귀산과 추항이 남의 신하와 자식이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급속한 국가발전과정에서 가부장가족의 윤리인 효보다는 국가윤리인 충이 더 시급하게 요구되는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더욱 부부와 형제 관계의 가족윤리를 빼버리는 대신에 친구 사이의 믿음을 강조하는 덕목을 세속오계에서는 세 번째 순서로 올렸다. 물론 친구 사이의 믿음은 오륜에서도 다섯 번째 순서로 들어 있으나 세속오계의 교우이신(交友以信)은 오륜으로부터의 영향보다는 씨족사회 이래의 미성년집단(未成年集團)의 전통적인 사우(死友), 또는 맹우(盟友) 관계가 특별히 강조된 결과였다고 본다. 실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친구 사이의 믿음에 관련된 이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고 있는데, 앞서 지적한 진흥왕대의 사다함과 무관랑, 진평왕대의 귀산과 추항 등의 사실 등이 그러한 예이다. 진흥왕 37년(576) 국가적인 제도로 정비된 화랑도(花郞徒)도 미성년집단의 공동체적 유제를 이용한 것인데, 화랑도가 원광의 세속오계를 받들었다고 믿어지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사우관계를 맺은 청소년사회에서, 그리고 집단화된 화랑도 사이에서 중요시되던 믿음(信)의 덕목에 의하여 옆으로 사회적인 결합을 이루고, 그것이 충(忠)을 통하여 위로 왕권과 연결됨으로 해서 국민을 결합하고, 사회를 통합시키는 중요한 국가윤리・사회윤리로서의 구실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세속오계에서는 화랑도나 청소년들이 특별히 귀중하게 여겼던 충과 신이라는 기본적인 덕목에 이어서 임전무퇴(臨戰無退)라는 용(勇)의 덕목이 네 번째 순서로 첨가되었다.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국가적 요청에 부응한 덕목으로 보인다. 용의 덕목은 일찍이 사다함과 귀산에 이어 특히 뒤이은 삼국통일의 전쟁에서 활약한 수많은 전쟁영웅들의 행적에서 실제 그대로 구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통일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대표적인 인물로서 관창(官昌)・반굴(盤屈)・김영운(金令胤)・김음운(金歆運)・열기(裂起)・눌최(訥催)・취도(驟徒)・찬덕(讚德)・해론(奚論)・소나(素那)・비녕자(丕寧子)・거진(擧眞)・합절(合節) 등의 행적이 ‘삼국사기’ 열전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지배층에 속하는 귀족 출신뿐만 아니라 일반서민이나 노비 출신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용은 실로 신라인 전체가 상하 신분의 구분 없이 준수하는 국민윤리의 덕목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참혹한 살육이 자행되는 빈번한 전쟁 상황에서 살벌해지는 인심을 불교의 자비정신으로 순화시킬 필요성에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의 덕목이 마지막으로 추가되었다. 살생유택의 덕목은 바로 임전무퇴의 덕목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광으로부터 세속오계를 처음 받은 귀산과 추항도 다른 4개의 덕목과 달리 살생유택의 덕목만은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삼국사기’ 귀산전에서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만,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하라는 것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육재일(六齋日)과 봄・여름철에는 살생치 않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안되니, 말・소・닭・개를 말하는 것이며,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꼭 필요한 것만 죽이고,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다. 이것은 가히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살생유택의 덕목만은 귀산 등이 처음 듣고 쉽게 이해하지 못해서 보충설명을 요구했던 사실을 보아 당시에도 다소의 논란이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하는데, 살생을 용인했다는 측면보다는 무의미한 살생을 억지하려는 의지의 소산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기백은 가축의 중요성을 강조한 덕목으로 해석하였으나, 그러한 경제적 이해관계보다는 살벌한 전쟁 상황에서 살생의 최소화와 인심의 순화라는 불교의 자비정신 구현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결국 화랑도로 대표되는 신라 청소년들에게 세속오계의 다섯 가지 덕목 가운데 특별히 귀중하게 받아들여졌던 기본적인 덕목은 충과 신, 그리고 용이었던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덕목은 청소년이나 화랑도의 덕목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성인이 된 뒤에도 정치인이나 군인으로서 일생동안 그대로 실천하여 국민정신을 항상 신선하게 하였으며, 국민윤리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한 것이었다. 위로는 국왕과 귀족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라인 모두에게 시대정신으로 확대되어 받아들여짐으로써 마침내 약소국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세속오계 가운데서도 특히 충과 신, 그리고 용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덕목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金庾信)의 다음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의하면, 문무왕 8년(668) 6월 고구려의 정벌을 위해 평양성을 향해 출정하는 신라군의 두 장군인 김흠순(金欽純, 김유신의 동생)과 김인문(金仁問, 문무왕의 둘째 아들)에게 김유신은 다음과 같은 최후의 교시를 내리고 있었다. “대저 장수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과 임금의 조아(爪牙)가 되어서 승부를 시석(矢石) 사이에서 결판내야 하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인심(人心)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신(忠信)으로써 존재하고 있으며, 백제는 오만(傲慢)으로써 망하였고, 고구려는 교만(驕慢)으로써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정직(正直)으로써 저편의 왜곡(歪曲)을 친다면 뜻대로 될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나라 밝은 천자의 위엄을 빌고 있어서랴? 가서 노력하여 그대들의 일에 실패함이 없게 하라.”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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