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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복진과 금산사 미륵대불-하

기자명 주수완

김복진에게 전통은 아름다움 아닌 ‘원형복원'

김복진 불상 현대적으로 느껴짐은 통일신라시대 미술 경향 때문
독특한 조선시대 불상 복원함에 그 원형 유지하려던 의도 보여
일섭 스님은 시대 반영한 조성 원해…양식 아닌 복원 방향이 쟁점

김복진의 모형불상(좌, 공주 신원사 소림원)과 일섭 스님의 모형불상(우, 제주 정광사) 각각 높이 1m.

금산사 미륵대불의 입찰을 두고 일섭 스님과 김복진이 경쟁한 것을 과연 전통미술과 서양미술의 대결 구도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의 경쟁을 이해하기 위해 두 분이 제출한 포트폴리오 성격의 모형 불상을 살펴보자. 금산사는 불상 제작자 선정을 위해 높이 1m의 모형불상 제출을 의뢰했고, 이에 따라 각각 만들어진 두 분의 미륵입상이 현재 제주 정광원과 공주 신원사 소림원에 소장되어 있다. 덕분에 미륵대불 제작에 앞서 두 분이 어떻게 이 불사(佛事)에 접근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일섭 스님의 작품이야 전통적인 화승의 입장에서 조성된 것이므로 이 모형 조각상이 전통조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김복진이 제출한 작품은 항상 ‘서양미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편견을 깨고 두 모형을 살펴보자. 우선 일섭 스님의 작품은 언뜻 조선시대 불교조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지만,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양쪽 소매에서 흘러내리는 옷자락은 옷 자체가 굵으면서 심하게 구불거리고 있다. 이에 반해 김복진의 모형불상에서는 상당히 기하학적인 패턴을 보이며 얇게 겹쳐진 것처럼 표현되었다. 사실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김복진의 얇게 다려놓은 것처럼 규칙적으로 포개지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일섭 스님의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오른손 손목에 걸쳐져 가슴을 지나는 가사 자락으로 말려 들어간 옷자락의 표현에 있어서 일섭 스님의 불상은 중앙 기준선 너머 왼쪽(향우측)으로 넘어가 있어 좌우대칭이 깨어지고 대신 자유분방한 느낌이 드는 반면, 김복진의 불상은 옷주름이 엄격한 좌우대칭을 유지하고 있어 보다 전통적이다. 이 말려들어간 옷자락 아래로 U자형을 그리며 하체로 흘러내리는 옷자락 역시 일섭 스님의 불상은 다소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김복진의 불상은 패턴화된 경향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복진의 불상에서 더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서양미술 영향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일섭 스님의 작품은 조선시대 불상에 새로움을 조금 더한 경향을 보인다면, 김복진의 작품은 통일신라시대 미술을 모방한 듯한 인상을 강하게 준다. 이 통일신라시대 미술은 흔히 “이상적 사실주의” 미술로 불리는 만큼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가장 사실적인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졌던 시대였고, 그 절정에 석굴암이 있다. 그런데 통일신라미술은 인도 굽타시대 미술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기 때문에 김복진이 통일신라시대 미술을 지향한 것을 두고 ‘서양’ 대신 ‘서방’이나 ‘서축(인도)’의 영향이라고 평가한다면 모를까, 특별히 이 작품에서 근대기 서양문화의 영향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일섭 스님에게 있어 ‘전통’이란 어쩌면 불상을 만드는 데 있어 그 시점에서 가장 충실하고 아름다운 불상을 만드는 것이었겠지만, 김복진에게 ‘전통’은 “원형복원”의 개념이었던 것 같다. 지난 글에 실린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금산사 미륵대불의 흑백사진과 이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비록 흑백사진 속 미륵대불은 흐릿하여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육계가 낮고, 가슴에 띠매듭 없이 옷자락이 몸에 완전히 밀착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일섭 스님과 김복진의 작품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원래의 불상에 가까운가 살펴보면 김복진의 작품에 더 눈이 가게 된다. 일섭 스님의 불상은 높고 뾰족한 육계, 가슴의 띠매듭, 두꺼운 옷자락 등 원형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은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실상 조선시대의 불상은 대부분 좌상이기 때문에 수문 스님이 1637년에 복원한 금산사 미륵대불은 매우 드문 조선의 여래입상이었다. 그런데 이 상도 언뜻 일반적인 조선시대 불상 착의법과 달리 옷이 얇고 몸에 밀착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김복진의 서양적, 혹은 근대적 개념이란 이런 독특한 조선시대 불상을 복원함에 있어 그 원형을 유지하려고 했던 의도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에 반해 원형을 무시하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불상을 조성하고자 했던 일섭 스님의 의도는 그런 면에서 전통에 가까운 접근이었을 것이다. 결국 조각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 복원 방향이 쟁점이었던 것이다.
 

김복진이 조성한 법주사 미륵대불. 1939년부터 시멘트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나 1940년 김복진의 작고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1963년에야 완성됐다.

그런데 흑백사진을 보면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올린 모습은 오히려 일섭 스님의 모형불상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김복진은 그 반대로 했다. 양식적으로는 원형을 유지하면서 손의 좌우를 바꾼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 점이 중요했다면 김복진에게 양식은 그대로 하되, 손은 원래의 불상처럼 좌우를 바꿔 해달라고 주문했어도 되었을 텐데, 금산사는 왜 그대로 따랐을까? 김복진의 주장이 타당했던 것일까? 아니면 선택되었으니 그대로 믿고 따르겠다는 뜻이었을까?

이 입찰건으로 일섭 스님이 얼마나 서운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분의 기록을 통해 언제부터인지 스님도 통일신라시대의 조형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혹 일섭 스님도 김복진의 선택에 대해 깊이 동감하고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김복진은 금산사 불사가 끝나고 1937년 계약하여 1939년부터 제작에 착수한 법주사 대불도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으로 작업했다. 김복진의 역할은 한국 불상조각사에서 서양식 조각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조각으로의 회귀라는 유행을 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계기는 금산사 미륵대불이었던 셈이다.

금산사 미륵대불은 결국 김복진의 원래 모형과 거의 동일하게 1936년 8월 완성되었다. 다만 모형에 보였던 환한 미소는 사라지고 보다 근엄한 얼굴로 바뀐 것이 눈에 띈다. 표정마저 통일신라 불상의 엄숙함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두운 시대상이 홀로 웃고 계신 부처님을 차마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일까?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37호 / 2020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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