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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문화복지재단 이사장 하림 스님

일어남 뿐만 아니라 사라짐까지 전부 보아야 제대로 된 명상

아픔도 회피하거나 조절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삶 힘든 이유는 힘든 마음 숨겨 놓고 평안 구하기 때문
판단과 회피로는 여러생을 도망쳐도 평안 구할 수 없어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몸으로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하루하루 매 순간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이 한 시간이 되고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됩니다. 그 길로 가면 계속 그 패턴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긴 시간, 긴 세월, 심지어 여러 생을 살아도 경험하는 방식, 기쁨과 슬픔,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될 때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것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한없이 갑니다.

오늘 시작하는 명상지도사 과정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몸의 느낌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지 100일 동안 열심히 보는 연습입니다. 열심히 보면 그 마음과 몸에 ‘나’라고 붙여놓은 실상이 보입니다. 실상이 보이면 본 만큼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아는 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보고 확실하게 알면 다음에는 그 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명상은 그런 마음을 잘 보는 공부입니다. 얼마나 명료하게 분명하게 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나아가 해탈로 갈 수 있습니다. 이 공부를 하는 동안 몸으로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픔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회피하지 말고, 습관적으로 조절하려고 하지 말고, 돌려보지 말고, 정확하게 직면해서 정말 자신이 어떤 마음을 어떻게 쓰고 사는지 분명하고 명료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행복선(禪)’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산다고 이야기를 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요즘 행복의 경험으로 여행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여행은 저 위에 별처럼 빛나는, 말하자면 시, 공간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여기에서 좀 떨어져서, 분리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휴식도 되고 자기 자신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두 번은 그런 느낌이 있더라도 1년씩 분리가 계속된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앞서 명상은 보는 만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기 마음을 얼마나 잘 보는가에 따라서 행복감을 느끼는 조건이 훨씬 좋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느낌, 고통스러운 느낌은 결국 집착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집착된 상태가 힘들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거꾸로,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집착으로부터 분리입니다. 그래서 행복으로 가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고통으로부터 분리해서 그 고통을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전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장소나 실체가 없지만 어떤 인연이 맞으면 그것이 바람처럼 흔적 없이 영상으로 떠오릅니다. 실체도 없고 장소도 없지만,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중에는 내가 분명하게 명료하게 보는 것을 하지 않은 것들만 남아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꾸 떠오르고 반복되게 일어나는 마음은 자신이 충분하고 명료하게 보지 못했던 마음입니다. 

스스로 힘들어하는 이유는 힘든 마음을 자꾸 숨겨놓고 묻어놓고는 정작 왜 힘든지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상으로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진다는 건 그것을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는 것일까요?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과 물이 분리되어 보이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음도 가만히 있으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애써서 보려고 하면 더 보이지 않습니다. 떠올리려고 애쓰지 말고 편안하게 있으면 보입니다. 알아차림을 위해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디 두어야 그 마음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염처(念處)’라고 합니다. 마음을 두는 곳입니다.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손바닥을 보기 위해서 손에 눈을 바짝 붙이면 오히려 손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손바닥을 보려면 눈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도 두는 지점이 있어야 잘 보입니다. 마음을 두는 네 곳이 신수심법(身受心法)입니다. 마음을 이 대상에 두고 관찰합니다. 계속 살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짜증이 났습니다. 짜증이 일어나면 짜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짜증을 지켜보면 사라집니다. 짜증이 나서 사라지는 것까지 보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는 염지관(念止觀) 명상이라고 합니다.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까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일어나는 것까지만 봅니다. 화났다는 것은 알아차림이 되었는데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관찰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명상하지 않은 것이고 ‘조견(照見)’하지 않은 것입니다. 

조견은 비추어본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비추어보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까지 보는 것,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모두 보는 것입니다. 손을 바닥에 대어보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차가운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보셨나요? 아마 대부분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이처럼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기는 쉽지만 사라지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만났을 때 느낌과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까지 보아야 합니다.

따뜻한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느낌이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다면 관찰을 멈춘 것입니다. 어떤 것도 지속하는 건 없습니다. 따뜻했다가 따뜻한 그것이 사라집니다. 그다음 다시 따뜻함을 느끼는 건 다른 경험입니다. 그래서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합니다. 실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겨서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생기자마자 사라진 것들입니다. 생기자마자 사라졌는데 그 그림자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경험할 뿐이지 실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마음, 당황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는 것은 모두 명상의 대상으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어떻게든 조절해보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은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또 어떤 마음은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6년 동안 뼈만 남을 정도로 열심히 해봐도 성공하지 않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다고 고백하십니다. 죽기 직전까지 하셨으니까 자신보다 더 치열하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같이 미련하게 하지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것은 그러한 의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마음을 그냥 잘 수용하고 관찰 대상으로 삼아서 그 마음을 명료하게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확실하게 보일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하신 뒤 하룻밤만에 깨치신 것입니다. 

저와 함께 공을 차는 분 중에는 어떤 문제가 생겨 시비가 붙으면 자꾸 얼굴에 손을 대는 습관이 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폭력이 됩니다. 그분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셨습니다. 동작 자각이 안 된 것입니다. 이런 습관은 동작 알아차림으로 명상을 지속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만났을 때 손이 가는 것을 계속 알아차리면 손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중간에 그 마음이 사라집니다. 또 평소 걱정을 많이 하는 분이라면 그 걱정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관찰하면 됩니다. 실상을 보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을 씻을 때도 손에 물이 닿는 것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면 명상이 됩니다. 30초 손씻기를 한다면 그 손씻기가 바로 명상입니다. 요즘 박찬호 선수가 맥주 명상을 한다고 합니다. 맥주를 컵에 따를 때부터 맥주에 주의를 둡니다. 맥주를 따르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거품을 보고 향을 맡고 마시면 목에 넘어가는 촉감, 그것을 다 알아차림하면서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맥주 명상인데 오감 명상에 해당합니다. 만약 자신이 커피를 좋아한다면, 커피를 마실 때도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하는 동안 알아차림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5분이 될 수도 있고 10분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걷기 명상, 먹기 명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상에 마음을 두고 명상할 수 있습니다.

대신 명상할 때 자꾸 판단하려고 한다면, 이 판단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냥 바라보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감정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 감정은 작아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다시 드러납니다. 왜 그럴까요? 바라보지 않고 경험만 하기 때문입니다. 판단과 회피로는 여러 생을 도망 다니더라도 봄이 되면 싹이 나듯이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떠오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쓰고 사는지 명료하게 보아야 합니다. 명상을 통해 자신을 바로 보는 삶, 그 길을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5월1일 부산 미타선원에서 진행된 ‘영도문화복지재단 부설 행복선명상상담센터 제2기 명상지도사 과정’ 첫 강의에서 이사장 하림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38호 / 2020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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