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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비어있는 존재세계

‘대머리’ ‘어른’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아니다

세상 인식 위해 두루뭉술하게 투사하는 편리한 상에 불과해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것이 연기법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보니 스스로이게끔 하는 자성도 없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수십 명의 군인이 한적한 시골길에서 행군하고 있다. 일렬종대로 ‘1자’를 그리면서 질서 정연히 걷는다. 그런데 여기서 ‘1자’는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행군하는 군인들 옆 길가에는 개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수많은 개미가 ‘S자’ 형태로 움직이며 먹을거리를 운반하고 있다. 이 ‘S자’는 또 어찌 그리 생긴 것일까? 군인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짙푸른 가을 하늘을 보니 철새들이 ‘V자’를 그리며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들에 의해 ‘V자’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일부 철학자들은 군인과 개미, 그리고 새들이 만들어 내는 ‘1’ ‘S’ 그리고 ‘V’의 존재론적 기원이나 존재방식에 물음을 던지며 숙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자들이라면 이 모두가 희론(戱論)에 불과하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숫자와 문자의 모습으로 사물이 움직이는 형태를 표현해 놓고서는, 그 표현방식의 상(相)에 얽매여 마치 없던 존재자가 새로 창발된(emerged) 것인 양 착각하고는 그 존재의 기원과 존재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1’ ‘S’ 그리고 ‘V’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세계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편리한 개념적 도구로 존재할 뿐이다. 이 세상은 이런 ‘1’ ‘S’ 그리고 ‘V’ 같은 것들이 공(空)하여 비어있다.

머리숱이 얼마나 빠져야 대머리가 될까? 35%, 50%, 50.1%, 아니면 99.9%? 아무도 분명히 답변해 줄 수 없다. 빨래가 얼마나 많이 모여야 빨래더미가 되나? 옷 열 벌, 열 한 벌, 아니면 아흔 아홉 벌? 담이 없는 시골 집 앞마당에서 얼마나 더 나가야 야외들판이 시작될까? 5미터, 6미터, 10미터, 아니면 50.1미터? 나이가 몇 살이 되어야 어른이 되나? 18세, 18.01세, 25세, 결혼하는 날, 아니면 부모가 되는 날?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도 아무도 명확히 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대머리’ ‘빨래더미’ ‘야외들판’ ‘어른’ 등은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두루뭉술하게 투사하는 편리한 상(相)일 뿐이기 때문이다. 상에 불과한 것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데서 지적(知的) 고뇌가 시작된다.

세상은 원래 이런 것들이 비어있다. 수많은 부품이 모여 만들어진 내 핸드폰은 그것 나름대로 실재(實在)할까? 그것이 실재한다면 그것 스스로의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핸드폰이 가지는 모든 속성은 핸드폰을 이루는 작은 부품들이 서로 연결되어 가지는 속성들로 남김없이 분석된다. 그래서 핸드폰이라는 전체(whole)는 부품들이라는 부분들(parts)로 그 존재와 속성이 모두 환원된다. 전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 모든 사물은 각각 하나의 전체(whole)인데,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전체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래 이 세상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체들이 모두 비어있는 곳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사물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정말 많이도 비어있다.

대학 강의실마다 수강하는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가방(bag) 수십 개를 볼 수 있다. 큰 것, 작은 것, 들고 다니는 것, 메고 다니는 것, 바구니처럼 생긴 것, 빨간 가방, 파란 가방, 검정 가방 등 모양과 색깔이 거의 모두 다르다. 만들어진 재질도 많이 다르다. 플라스틱, 가죽, 천, 밀짚 등. 

용도도 달라서 책가방, 도시락 가방, 쇼핑백, 핸드백, 서류가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같은 핸드백이라도 실용적인 것과 사치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그 모양, 색깔, 재질 등이 천차만별이다. 이 세상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종류의 가방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것들을 모두 가방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아마도 가방이 수행하는 ‘운반도구’로서의 역할일 것 같다. 요즈음은 온라인으로 쇼핑할 때 구매 사이트에서 구입할 물건들을 잠시 모아 놓는 ‘쇼핑백’도 있는데, 온라인에서만 존재하지만 물건을 담아 운반하는 도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쇼핑백(쇼핑가방)’으로 불린다. 그래서 운반도구라는 기능이 가방의 본질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본질로서의 기능이 이 세상에 실재할까? 그렇지 않다.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가방’이라고 부르는 특정 물체들뿐이다. 한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가방을 눈여겨 살펴보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모양과 무게, 질감, 그리고 색깔을 가진 물체이지, 소위 ‘운반도구로서의 기능’과 같은 추상적인 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상의 실재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가방이 있어서 이 모두에 공통인 모양이나 재료 또는 색깔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가방’이라는 단어로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우리 목적에 맞는 적절한 물체를 골라 사용할 뿐이지 이런 물체들 사이에 어떤 구체적인 공통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가방이 얼마든지 가방이 아닌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위의 요점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준다. 내가 들고 다니는 각진 서류가방이 서류를 운반하기 위해 쓰면 가방이지만, 누군가의 얼굴을 가격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가방이 아니라 흉기다. 첩보영화에서처럼 서류가방 안에 시한폭탄을 넣어 건물을 폭파시킨다면 살상용 무기가 된다. 귀금속으로 멋지게 장식해 전시하면 예술품이 되겠고, 그것을 연인에게 선물하면 사랑의 징표도 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들고 다니는 이 물체가 운반도구라는 고정된 기능을 본질 또는 자성(自性)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내가 ‘운반’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쓰기 때문에 한 동안 ‘가방’이라는 보통명사가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방’이라고 부르는 아무 물체도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공하다. 

그런데 가방과 같이 기능과 관련하여 마치 그것에 변치 않는 자성이 존재하는 듯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사물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펜, 펌프, 엔진, 책상, 의자, 컴퓨터, 자동차, 테이블, 부엌, 학교, 식당, 절, 교회, 국가 등 끝없이 많다. 서양철학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물이 기능에 의해 정의(定義)되고 본질이 부여된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이런 기능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능적으로 정의된 이 세상의 참으로 많은 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이런 것들이 모두 비어있다.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가르침이 붓다의 연기법이다. 아무 것도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스스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보니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하는 자성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물은 자성이 비어있다. 즉, 자성이 없어 공하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38호 / 2020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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