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제8 의법출생분 말미에 “만약 어떤 이가 이 경에서 네 구절로 된 게송[四句偈頌]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에게 일러준다면 그 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채워놓고 여래께 공양 올리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사구게송'을 언급한 것은 제8분을 비롯하여 제11분 등 총 6차례이다. 경문에서 ‘사구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受持乃至四句偈等)'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져 ‘금강경’ 같은 경문이 성립되면 당연히 그 경문 전체를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해야 그 공덕이 엄청날 것이지만 그것의 절반 아니 그 일부만이라도…, 그렇게 줄여가다 ‘최소한 네 구절로 된 게송 한 수'만이라도 수지독송하고 위타인설하면 그 공덕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덕을 지을 최소한의 기준이 ‘사구게송’ 한 수이다.
그러면 ‘금강경’ 안에서 사구게송을 찾아 수지독송하고 위타인설하는 것이 가장 손쉽게 큰 공덕을 얻게 되는 방법이 되니 급한 마음에 게송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글을 찾아보면 제26 법신비상분에 ①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형색으로 나보거나 음성으로 나구하면, 그는 삿된 도행하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다) ②응관불법성(應觀佛法性), 즉도사법신(即導師法身), 법성비소식(法性非所識), 고피불능료(故彼不能了).(법성으로 붓다보라 법신이 곧 스승일세. 인식되지 않는 법신, 그 까닭에 알 수 없지)라는 두 수의 게송이 있고 마지막 제32 응화비진분에 ③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일체 모든 유위법은, 꿈 그림자 환영포말, 이슬같고 번개같아, 그와 같이 봐야하리)이라는 한 수의 게송이 있다. 이 가운데 게송 ②번은 ‘금강경’을 통째로 외우는 분도 고개를 갸우뚱할 터인데 이 게송은 범어원문에 있고 현장 스님의 한역본에도 있지만 우리가 주로 읽는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본엔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낯이 설 수밖에 없다.
‘금강경’에서 한역된 게송 세 수는 모두 오언절구로 되어 있다. 한시에는 4행에 5자씩인 오언절구와 7자씩인 칠언절구가 있으며 8행으로 되어있으면 율시, 각운이나 글자 수에 일정한 규칙이 없는 고시(古詩) 등이 있다. 인도에도 불규칙적인 틀을 지닌 시가 없진 않지만 규칙을 갖춘 것은 모두 4행으로 된 절구(絶句)뿐인데, 한 행에 들어가는 음절 숫자가 4음절에서 최대 26음절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인도에선 4행의 절구가 유일해서인가 숫자 4를 완벽한 것으로 여긴다. 일설에는 살아있는 것들 가운데 사지(四肢)를 지닌 것이 가장 뛰어난 까닭에 그리 여긴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인도의 ‘4'는 중국의 ‘3'에 해당하는데 중국은 세 발을 가진 솥[鼎]이 가장 안정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에서 3을 완벽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금강경’에서 여섯 차례나 언급된 ‘catuṣpādikā[四句]gāthā[偈頌]'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위에 나열된 세수의 게송을 사구게송이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인도식 사구게송이 ‘네 단락이라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게송'을 의미하니 내용에 근거해 ‘금강경’식 사구게송을 정의해보면 “사구게송 한 수가 게송 형태로서 결함이 없듯, 법문 가운데 내용의 누락없이 서술된 하나의 가르침” 정도가 된다.
고대문명은 글을 서술할 때 운율에 맞춘 시가형식을 갖추었다. 그래서 시가형식을 벗어난 글은 가치가 없다는 의미에서 산문(散文)이나 소설(小說)이라 하였던 것 같다. 인도도 마찬가지였으니 인도문화의 양대 서사시인 마하바라따와 라마야나는 각각 20만수와 2만4천수의 게송으로, 전체 산스크리트 문장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붓다짜리따[佛所行讚]는 1039수의 게송으로 이뤄져 있다. 불교성전인 니까야가 대부분 산문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점이 브라만교나 나중의 힌두교도에 폄하의 꺼리가 되었다는데 대승경전이 저술되며 그 점에 있어서 고심이 없진 않았던 것 같으니 그래서 ‘catuṣpādikāgāthā'란 표현이 경전에 남아있는 것 같다. ‘금강경’을 읽으며 구마라집본이건 현장본이건, 범어원본이건 어떤 내용인지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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