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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호법 금강무 화우와 샤낙

21명이 펼치는 군무 ‘샤낙’은 티베트 불국의 역사 시작됨 알리는 춤

불교 탄압한 왕 죽인 라롱, 수호신으로 승화…복색은 의장으로
수많은 북·롤모·둥첸·컁링 그리고 범음성은 무대의 장대함 더해
호법 영웅에 갖가지 동물 등장하는 건 동물숭배사상 습합된 것

대경당 앞에서 군무를 추고 있는 모습. 2층 회랑 가운데 법석에서 총범태 라마가 내려다보고 있다.

동자승들이 퇴장하고 본격적인 ‘참’ 의식으로 접어들었다. 네 사람의 나승이 컁링으로 신호를 하자 동물 탈을 쓴 두 사람의 무승(舞僧)이 대경당 앞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호법 영웅들인데 중국식으로는 ‘화우(华吾)’라고 한다. 화우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컁링과 법고의 타주에 맞추어 한 계단 한 계단을 느리고 무거운 스텝으로 내려왔다. 마당에 나와서 춤을 추는데 둥첸의 소리와 같이 절제되고 중후한 동작은 춤이라기보다 호법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몸짓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렸다. 

녹색 탈을 쓴 화우의 춤(위)과 대위덕금강의 춤(아래). 구슬 장식의 청색 무복에 왼손에 해골, 오른손에 밧줄을 들고 있는 모습이 탕카 속 대위덕금강과 똑같은 모습이다.

똑같은 동작으로 두 명씩 짝을 지어 청·적·녹·황(갈색에 가까움)의 순으로 8명의 무승이 등장하는데 오른손에는 금강저, 왼손에는 호법진언과 해골을 상징한 의물을 손가락에 걸고 있다. 이어 뿔 달린 짐승을 상징한 수사슴과 수소가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암수 한 쌍의 야크로 분한 대위덕금강이 등장하였다. 뿔이 달린 숫컷 야크는 구슬 장식을 덧입은 푸른색 법의에 오른손에는 해골 막대, 왼손에는 악귀를 잡아들이는 포승줄을 든 모습이 탕카 속 모습과 같다. 암컷 야크는 정수리에 오색 술을 꽂았다. 2층 회랑에서 지켜보고 있던 총법태 라마가 가탁을 내렸는데, 이를 받아든 것은 암컷 야크였다. 가탁을 받아든 암컷 야크 대위덕금강은 가탁에 대한 답례로 한참 동안 독무를 추었다. 이때 양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무릎을 굽혔다 일어나는 동작이 한국의 처용무와 흡사하였다. 이어서 12명의 화우들이 한참 동안 군무를 추고 난 후 퇴장하였다.
 

으뜸 샤낙의 지휘를 받으며 등장하고 있는 샤낙 군단.

이어서 그 유명한 샤낙의 순서가 되었다. 동자승과 화우들이 2명씩 짝을 지어 등장하는 것과 달리 샤낙승들은 으뜸 샤낙의 지휘를 받으며 20명이 동시에 등장하니 군중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을 리드하는 으뜸 샤낙은 한 발짝 한 발짝 뒷걸음질하며 금강저와 호법 의물을 내밀어 보이며 지휘하였다. 그 모습은 나에게 BTS 멤버 일곱을 합친 것 보다 더 멋있었다. 붉고 푸른 비단 무늬와 두루마기 위에 덧댄 구슬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21명이 춤추며 흰 동선을 한 바퀴 돈 뒤 2층 회랑을 향해 섰다. 그러자 총법태 라마가 으뜸 샤낙을 향해 가탁을 내렸다. 그 모습은 마치 예포를 쏘듯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영예로움을 느끼게 하였다. 가탁을 수(受)한 으뜸 샤낙은 한참 동안 화답의 독무를 추었다. 

샤낙의 ‘샤’는 티베트어 모자, ‘낙’은 검은색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춤의 유래는 895년경 불교를 탄압하던 왕을 활로 쏘아 죽임으로써 왕정이 종식되고, 불국의 역사가 시작된 데서 시작되었다. 당시 왕을 쏘아 죽인 라롱은 검은 옷과 흑포를 두르고 어둠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것이 샤낙춤의 복색과 의장(儀裝)이 되었고, 라롱은 불교 수호신으로 승화되었다. 샤낙 의상은 얼핏 보면 20명이 모두 같은 색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바탕색이 청·적·녹·황·흑으로 차이가 있으며 흑모에는 호법을 상징하는 만다라가 그려져 있다.

으뜸 샤낙의 독무에 이어 21명의 샤낙이 큰 원을 돌며 한참 동안 군무를 추었다. 이어 퇴장했던 12명의 화우들이 다시 등장하여 샤낙과 함께 링꼬르, 바꼬르, 낭꼬르의 3원을 빽빽이 채워 춤추었다. 흑, 백, 3색, 4색, 5색에 갖가지 비의(秘意)를 담은 의상과 의물을 들고 꼬르를 돌며 춤추는 모습이 마치 만다라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만약 그해의 봉기와 학살이 없었더라면 반드시 드론을 들고 재촬영하러 갔을 것이다.  

악대의 타주와 송경, 호법불공의식이 시작되었다. 한 스님이 원으로 둘러서 있는 무승들의 가운데에 놓인 법탁 위의 의물을 으뜸 샤낙에게 건네자 으뜸 샤낙은 이를 번갈아 받아들고 춤을 추었다. 호법불공의식을 마치자 의례를 주제하던 집법사(執法司)가 퇴장하고, 샤낙을 비롯한 호법신들의 군무가 시작되었다. 이때 온 마당이 나팔소리, 북소리, 롤모소리, 수십명의 스님이 추는 발디딤과 샤낙의 옷에 걸친 구슬소리 사이에 굵은 저음의 범음성이 울려나는데 그때의 범패는 선율이라기보다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수많은 북과 자바라(롤모), 둥첸, 컁링이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어우러지는 범음성과 춤의 위용이 얼마나 장대한지 마당이며 하늘이며 대경당의 지붕까지 진동하는 듯하였다.
 

소대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스님들.

군무가 끝나고 승단과 대중이 사원 문밖으로 소대행렬을 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니 다시금 호랑이와 기마단이 나타났다. 타주가 계속되는 가운데 의물을 소대하고, 몇명의 스님이 광장 밖에 설치되었던 ‘랑카부(符)’를 광장 오른쪽 측면에 놓여 있는 끓는 기름 솥에 넣어 태운 후 꺼냈는데 이는 모든 악령을 다 소멸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총법태 라마가 공양한 ‘도마’를 불더미에 던져 엄청난 폭음 속에 요괴와 잡귀들을 물리쳤음을 알렸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에 온 산이 연기로 자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의식을 중국식으로 보면 소대(燒臺)라 하겠지만 밀교적 관점에서는 외호마일 것이다.

소대의식을 마친 승단은 다시 대경당 앞에 모여서 삼십여분간 마무리 군무를 춘 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런데 승단이 퇴장하기 무섭게 진귀한 장면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춤의 동선을 표시해둔 횟가루를 긁어 담느라고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이다. 참무를 추느라 발디딤을 놓았던 횟가루를 신령스러운 것으로 여겨 한 줌이라도 더 긁어가려는 티베트 사람들의 모습에서 참무에 대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었다. 호법 영웅에 갖가지 동물이 등장하는 것도 이들의 동물숭배 사상이 습합된 것이다. 

소대 행렬을 보면 으뜸 샤낙과 암컷 야크만이 가탁을 법의에 걸치고 있어 두 호법 영웅의 위의를 실감하게 된다. 용맹의 호법 수컷 야크는 탕카 속에서 가탁을 걸치고 있기도 하지만 우유와 부드러운 고기에 새끼까지 낳는 암컷 야크가 가탁을 받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을 칭할 때는 남녀라고 하지만 동물을 칭할 때는 암수[雌雄]라고 하듯 생명의 진화에 유용한 것이 숭배 받는 인류문화의 보편적 현상이 참 의식에 녹아 있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근원에도 생존의 유리함이 있다. 필자는 각 민족의 음악적 취향에도 이런 현상이 있음을 ‘문명과 음악’을 통해 예시한 바 있다.  
 

소대행렬을 하고 있는 호법 영웅들. 으뜸 샤낙과 대위덕금강은 총법태 라마로부터 하사받은 가탁을 걸고 있다.

티베트 참무와 비교되는 한국의 처용무는 고려시대의 불교적 궁중악무로 전승되어온 것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궁중의 악무가 유교적으로 전환되면서 처용무는 오방처용무로 전환되었다. 궁중 악무가 정비되던 세종대에 아악 정비를 담당한 박연과 신료들은 유교와 사대주의를 추종하였지만 세종과 맹사성은 향악적 주체성을 강조하며 불곡 창제에 많은 공을 들였다. 성종대에는 모든 악정이 유교적으로 정착되었지만 이때 편찬된 ‘악학궤범’에는 처용무, 학무(鶴舞), 연화대무(蓮花臺舞)를 합설(合設)해 연행한 기록이 있으니 고려시대의 유습과 세종과 세조의 호불(好佛)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처용무 탈을 보면 한국의 여느 탈과 달리 우락부락한 모습인데, 이는 티베트의 화우탈과 닮았고, 화우탈의 머리에 꽂혀있는 해골과 처용탈에 꽂힌 복숭아가 악귀를 쫓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도 같다. 현행 처용무에서 양손을 들고 어르고 드는 동작, 발을 들고 휘젓는 동작, 양손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은 일반적인 궁중무용의 춤사위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동작이 금강저와 해골을 들고 앞으로 손을 내밀거나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것이 라브랑시의 참무와 흡사하여 깜짝 놀랐다. 한국의 궁중무용은 모두 여성들이 추는 데 비해 처용무는 남성이 춘다. 이는 비구승의 춤과 연결된다. 무엇보다 옛 문헌을 보면 악귀를 쫓는 나례춤으로 처용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어 춤의 목적과 상징성도 티베트 호법무와 연결된다.

한국의 작법무에 대한 의문을 품고 티베트를 가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네 작법무는 의례문에 지문(指文)이 없는 비본질적 요소라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네 작법무와 달리 티베트의 참의식은 모든 절차와 구성요소가 춤을 위해 구비된다. 그러므로 참무는 참의례의 본질이다. 이와 달리 우리네 작법무에 관한 사료(史料)와 기록을 조사해 보면 영산재 이전의 그 어디에도 작법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수륙의궤는 고려 광종대에 들어왔는데, 조선왕실은 희생된 고려 왕씨와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국행으로 설행하였다. 그러다보니 왕의 행렬이 시련으로 들어와 있다. 궤불을 내어 걸어 설단하는 것, 나팔을 불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 마당이라는 오픈된 공간에서 의례를 행하며 작법무를 추는 것도 원본 텍스트와 다른 양상이다. 그런가하면 통불교를 지향하고 있는 오늘날 중국과 대만은 사부대중이 다 함께 범패를 노래하는데 비해 밀교적 의례를 하는 티베트는 모든 절차를 스님들이 전담하고 대중은 감응하기만 한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의 불교의례를 스님이 전담하는 것 또한 티베트문화와 밀교방식에 더 가까워 한국 불교의례와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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