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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처용무

기자명 정혜진

‘느림과 비움’의 미학 오롯이 담긴 전통 춤

통일신라 때 불교사상 영향 받아 처용무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
일제강점기에  전승 중단됐다 1923년 순종 탄신 50년 맞아 재연
1971년 무형문화재…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

처용무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무형유산원 무형유산디지털 아카이브 소장
처용무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무형유산원 무형유산디지털 아카이브 소장

“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는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처용랑망해사에 따르면 신라 49대 왕인 헌강왕이 환궁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신하(日官)에게 물으니 답하길,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라 하였다. 이에 왕은 근처에 망해사를 세우도록 하였고, 왕명이 내려지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에 이곳을 개운포(開雲浦)라 이름을 지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었고,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랐는데 그가 처용이었다. 879년의 일이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과 처용을 혼인시키고 직책도 주었으나, 역신(疫神)이 처용의 처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범하고 만다. 처용이 귀가해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고, 그때 부른 노래가 처용가이고 춘 춤은 처용무라 한다. 그리고 처용의 그런 태도에 감복한 역신이 처용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약속하는데, 이것이 역신과 역병을 물리치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시작이다.

처용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동해 용왕의 아들로서 신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신라를 용이 지켜준다는 믿음에 기초한 호국용신앙 및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역사적 실존인물로 서역인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처용을 페르시아인이라고 보는 견해는 2010년에 발견된 이란의 중세 서사시인 ‘쿠쉬나메’에 따른 것이다. 쿠쉬나메에는 당나라에 망명 중이던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아비틴이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왔다가 신라의 공주와 혼인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파리둔은 훗날 페르시아로 돌아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은 영웅이 되어 신라와의 우호를 약속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개운포(현 울산항)가 당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던 곳이기도 하고, 또 처용의 가면에서 보이는 외모가 서역인에 가까우며, 실제 신라 고분의 출토물에서 페르시아산 유장품이 여럿 나오는 등의 유사사례가 많은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처용무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몇 번의 변화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처용무가 처음 등장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춤은 도상으로도 남아 있지 않아 원형의 유추는 불가능하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사상이 대중적인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어 처용설화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처용무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의식에서 벽사로 추어진 처용무와 연희의 춤으로 추어진 처용무가 별개로 존재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처음에는 독무로 추어지다가 세종대에 이르러 오인이 추는 오방처용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학연화대무와 함께 합설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지고 궁중의 나례에서 내용을 조금 달리하여 초입과 말미에 두 번을 연행하는 형식이 되었다.

나례는 음력 12월30일 새벽 3~5시 사이에 궁중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하던 의례이다. 잡귀를 몰아내고 깨끗한 기운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의식으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행해진 것이다. 나례에는 의식과 함께 연희도 벌어졌는데 산대희와 학연화대처용무합설 등이 그것이다.

궁중나례에서의 처용무는 처용의 가면을 쓰고 오행의 사상을 담은 청·홍·황·흑·백의를 입은 다섯 명의 무인이 출연한다. 처음에는 구나(驅儺)라는 귀신을 쫓는 의식을 한 다음에, 두 번째는 학무와 연화대의 춤에 이어 추어진다. 후자에서는 미타찬(彌陀讚)·본사찬(本師讚)·관음찬(觀音讚) 등의 불가(佛歌)를 화창(和唱)하는데, 이는 전자에 비해 다분히 연희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나례는 시대를 거듭하며 종교적 의미나 의례적인 요소는 희미해지고 광대들의 잡희가 늘면서 연희적 요소가 강해지며 나례희라고 까지 불렸다.

중종 때 당시의 문화 전반을 다룬 용재총화(慵齋叢話, 1525년)에 묘사된 처용무는 현재와는 사뭇 다르다. 이때의 처용무는 수행하는 승려의 불공하는 모습을 모방하여 여악들이 일제히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을 부르면서 바깥뜰에서 돌아 들어오면 악공과 광대들이 각각 악기를 잡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용이 물러가 자리에 줄을 지어 서면, 여악 한 사람이 ‘나무아미타불’을 선창하고, 여러 사람이 따라 부르듯 후창하며 관음찬(觀音贊)을 세 번 부르면서 빙 돌아 나간다. 이어 두 마리의 학이 나오고, 연꽃에서 나온 두 명의 기생이 나와 춤을 추다 물러가고 처용이 들어와 춤을 추는 형식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 추어졌다.

그러나 현재 추어지고 있는 춤은 불가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게 되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어 전승이 끊긴 처용무를 1923년 순종황제 탄신50년을 축하하는 연에서 이왕직아악부가 재연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처용무는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어진(仁) 마음은 덕(德)이요, 사랑(愛)으로 이를 실현하는 데는 은인자중하여 동보다 정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정중동의 정수가 처용무에 담겨있고, 여기에는 우리 춤의 바탕인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 오롯이 녹아 있다. 각박함보다는 여유와 관용으로, 쫓기지 않는 느긋함으로 꽉 채우지 않는 비움의 철학이다. 

이는 최근 불교계의 용단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따른 계엄령으로 개최하지 못한 지 40년 만에, 자발적으로는 최초로 연등회의 취소를 결정했다. 그 어려운 결정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하며, 다시금 불교의 깊은 관용과 자비의 마음을 처용을 통해 되새겨 본다.

정혜진 예연재 대표 yeyeonjae@gmail.com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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