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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권진규의 고뇌하는 붓다

기자명 주수완

완전한 존재 대신 보살과 부처의 중간자 표현

백제양식 드러나 보이는 길고 가늘게 왜곡한 인체표현 특징
말년에는 통도사 수도암 은거하며 최소 2점 이상 불상 조성
전통법식 배우라는 충고도 받았지만 독특한 인상 불상 남겨

‘여인입상’, 배나무, 1955년, 높이 58.8㎝, 오기노 슈스케 소장.

지난 회 끝에서 1939년 제작에 착수한 김복진의 대작 법주사 대불이 1940년 그의 요절로 중단되자 그의 제자 윤효중 등이 작업을 이어갔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법주사 미륵대불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1940년대에는 거의 완성된 모습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다. 1964년의 작업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불상의 얼굴이 검게 변하고, 새의 분비물들이 덮여있어 새 시멘트로 얼굴을 보완하고 보개를 씌우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때 원래의 얼굴보다 더 살이 붙은 풍만한 얼굴로 변형되었다. 1940년대 어느 시점에 대불이 사실상 완성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못했지만, 당시 김복진을 이은 근대조각의 거장 권진규(權鎭圭, 1922~1973)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추정해볼 수 있다. 

함경도 함흥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권진규는 미술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부모는 이를 반대했다. 때문에 먼저 일본에 유학 가있던 형과 함께 공부한다는 핑계로 일본으로 따라가 몰래 미술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다니던 중 1943년 태평양 전쟁을 위한 인력동원에 징발되어 히타치의 전투기 부품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 1944년 공장에서 도망쳐 고향 함흥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운영하던 과수원에 숨어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그가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에 참여한 것은 이듬해인 1946년부터였다. 따라서 법주사 미륵대불은 아마도 1945년 해방을 전후해서 공사가 재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권진규로서는 아직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기도 전이었다. 이후 그는 이쾌대가 서울 사간동에서 운영하던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6개월간 법주사의 대불공사에 참여한 다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체류하던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48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기 때문에 법주사 대불 공사는 그 전에 끝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글의 주제가 법주사 미륵대불은 아니지만, 권진규가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당시 불교계의 화제였던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이후 그의 미술세계에 불상 조형이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조각에 대해 연구자들은 “한국적 사실주의”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런 그의 조각양식은 이처럼 한국의 불상조각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부모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그가 불상을 다수 제작한 것도 맞지만, 동경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던 시기에 특별히 불교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활동하던 중 나중에 아내가 된 오기노 도모의 부친 부탁으로 1955년 목조보살상을 조성하기도 하는 등 불상제작과의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때 조성한 보살상은 몸에 장엄을 걸치고 있어 보살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머리에 보관이 없고 육계가 솟아있어 마치 부처처럼 보인다. 여하간 인체를 표현한 방식을 보면 그의 현대적인 조각과 달리 전통적인 고대 불상조각, 특히 일본 아스카시대 양식이나 우리나라 삼국시대양식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 호류지(법륭사)에 전하는 구다라(백제)관음상이나 혹은 젠코지(선광사)에 전하는 금동일광삼존불상처럼 주로 백제에서 건너갔다고 하는 불상들에 나타나는 길고 가늘게 왜곡된 인체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의도적으로 백제양식을 표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드러나 보이는 양식은 분명 백제양식에 다가가 있다.

말년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불상을 조성했고, 은거하다시피 통도사 수도암에 들어가 최소 2점 이상의 불상을 제작했기도 했다. 현재 이 불상의 소재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그의 불상들이 법당 봉안용이 아닌 감상용, 혹은 개인예불용의 작은 불상이라면, 혹 수도암에서 매진했던 불상은 본격적으로 법당에 봉안할 용도의 대형 불상이 아니었을까 내심 기대된다.
 

‘불상’, 목조, 1971년 3월, 높이 45㎝, 귄진규미술관.

그런데 이 시기 그의 불상도 도상적으로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불두는 국보83호 삼산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보살두와 유사하고, 몸은 강원도 원주나 포천 출토로 전하는 철불좌상의 몸과 닮아있다. 앞서 목조보살상도 보살의 몸과 부처의 머리를 혼용하여 제작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보살의 머리에 부처의 몸을 혼합한 셈이다.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권진규에게 불상을 조각하려면 전통법식부터 배워야한다는 충고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이처럼 보살과 부처의 요소를 뒤섞은 것을 지적한 것인지 혹은 다른 부분인지 알 수 없다. 또한 권진규가 정말로 불상의 기초 지식이 없었던 것인지, 혹은 알면서 의도적으로 뒤섞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매우 독특한 인상의 불상이 되었다.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세속의 예술가로서 불교미술을 제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속세를 떠난 스님의 평정심으로 제작한 불교미술이 아니라 현실에 머물며 더 고뇌에 찬 인간으로서 불교미술을 조성한 예술가들이라는 점에서 기획된 연재이다. 마치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에서의 예수가 초월적인 예수가 아니라 인간적인 예수로서 묘사된 것과 비슷하다.

권진규의 붓다는 자비의 미소나 깨달음의 환희를 반영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평온해보이지만 아직까지 질문이 남은 듯한, 아직까지 자신의 육신을 자각하고 있는 인간적 모습의 붓다이다.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모든 번뇌를 꺼뜨리셨다고 해서 남은 삶 동안 고민마저 하나도 없으셨을까? 종교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고뇌하는 인간으로서는 부처님도 왠지 그러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처에 투영하면서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부처 대신 일부러 보살과 부처의 중간적 존재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항마성도를 통해 부처가 된다면, 그래서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부처로 변한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이처럼 부처의 몸에 보살의 머리였던 순간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자신의 불상을 보고 본질보다는 법식을 이야기한 최순우의 충고에 권진규는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다. 만약 필자가 그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순우 선생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씀드렸을 것이다. 

“노사나불은 부처님이지만 보관을 쓰고 계시니 작가님의 불상이 법식에서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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