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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기자명 김준희

전통 화성 벗어난 진취·치밀함서 ‘쌍윳다니까야’ 연상

자연을 감각적으로 인식해 자신만의 음악어법으로 소화
파리 만국박람회 후 미술품 수집하며 동양문화에 관심
작품에 5음계 사용하고 중국 악기 탐탐·편경 소리 표현도

드뷔시의 생가에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와 드뷔시가 수집한 동양 미술품(프랑스 생 제르맹 앙레).
드뷔시의 생가에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와 드뷔시가 수집한 동양 미술품(프랑스 생 제르맹 앙레).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 1918)의 작품은 시적이거나 회화적인 느낌의 제목이 붙은 경우가 많다. 확실한 주제의 논의를 회피하고 잠재의식과 내면의 느낌, 인간의 심리상태에 중점을 둔 상징주의 문학은 모호하고 희미한 분위기의 드뷔시 음악과 잘 맞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실적 표현을 기피하고 즉각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했던 화풍 역시 드뷔시의 음악적 성격과 유사했다. 드뷔시 음악은 상징주의 문학이 주는 암시성과 인상주의 미술이 가진 빛과 색채를 모두 담고 있었다. 

드뷔시의 초기 작품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 나 ‘꿈(Reverie)’과 같은 우아한 선율이 중심이 되는 후기 낭만주의적인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를 경험하고 실험적이고 전환적인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드뷔시 특유의 음악적 어법이 정립되었다.  

가장 드뷔시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피아노 작품은 단연 ‘영상(Image I, II)’ 이다. 각각 1905년과 1907년에 작곡된 이 모음곡은 모두 세 개의 묘사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다. 드뷔시는 이 곡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화성을 사용해 작곡한 곡으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아이디어로 작곡한 것’이라며, ‘슈만의 왼쪽, 쇼팽의 오른쪽에 놓일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특히 ‘영상 제2권’에서는 ‘음악은 근본적으로 너무 엄숙하거나 전통적인 형식을 고수하지 말고, 리듬으로 이루어진 시간과 색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 1권보다 조금 더 미학적인 관점이 증폭된 두 번째 시리즈는 추상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첫 곡인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Clo ches a tracers les Feuilles)’는 몽환적이고 잔잔한 분위기의 조용한 곡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종소리가 계속되는 이 곡은 전체적으로 뚜렷하지 않은 움직임이 실제의 종소리와 흔들리는 잎사귀들의 이미지가 결합해 새로운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청각적 이미지와 회화적 이미지가 결합된 드뷔시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정적인 나뭇가지 위로 들려오는 동적인 바람의 소리, 그 바람이 만들어내는 종소리가 풍부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찰의 풍경 소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분위기의 첫 곡은 쌍윳다니까야 ‘유게품’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한낮 정오의 시간에 새는 조용히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불어 큰 숲이 울리니 나에게 즐거움이 생겨난다(숲소리의 경).’ 봄날의 고요한 울림과도 같은 청량함과 함께 설렘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첫 곡은 섬세하고 세련된 피아니즘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곡인 ‘황폐한 절에 걸린 달(Et la lune descend sur le temple qui fut)’은 조용한 독백과 같은 곡이다. 화성 자체가 선율처럼 사용된 이 곡은 조용한 명상풍의 분위기가 아무도 없는 사원을 연상시킨다. 또한 중세 선법(mode)를 선율의 일부로 사용하여 새롭게 표현했다. 이 곡의 헌정자인 루이 라루아 평론가는 특별히 이 작품을 두고 ‘내적인 응집력이 극대화된 곡’이라고 극찬했다. 

‘구름이 걷힌 하늘의 달처럼, 오염되지 않은 태양처럼 빛나니, 그대, 위대한 성자 앙기라싸는 영광스럽게 온 세상을 비춘다(각가라경에서).’ 쌍윳다까야의 한 시구가 연상된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을 뚫고 비추는 달빛을 나타낸 이 곡에는 pp(피아니시모)의 표시가 34개나 되며 ppp(피아니시시모)의 악상기호도 네 번이나 등장한다. 황홀한 정적과도 같은 빛의 묘사가 공간을 가득 채운 것 같다. 아득하게 사라지며 여운을 남기는 끝맺음도 인상적이다. 

세 번째 곡 ‘금빛 물고기(Poissions d'or)’는 드뷔시의 작품 중 동적인 묘사가 가장 뛰어난 곡 중 하나다. 경쾌한 토카타 풍의 이 곡은 드뷔시의 작업실에 있던 동양풍의 칠기에 그려진 금박의 물고기 그림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의 미술품을 모았던 드뷔시는 동양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전통적인 장·단음계의 사용 대신 5음 음계(pentatonic scale)등을 사용하며 동양적인 색채를 반영하기도 했다. 또한 이 곡의 중간부분에서는 중국 악기인 ‘탐탐’이나 ‘편경’의 소리를 표현하기도 했다. 

혹자는 이 곡을 어항 속 금붕어가 노니는 모습을 묘사했다고 하지만, 변화무쌍한 화성과 과감한 표현은 더 넓은 곳을 향해 내달리는 생명체의 모습을 그렸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방일하지 않고 싸움을 떠나 선정에 든 사람들은 그물을 찢은 물고기와 같이 참으로 저 언덕으로 가리라(짠다마싸의 경에서).’ 쌍윳따니까야의 시구에 보이는 물고기처럼 매끄럽게 유영해가는 다이나믹한 모습이 연상된다. 수면위로 오르기도 하고 잠수하기도 하는 불규칙한 움직임을 비르투오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관상용으로 갇혀있는 물고기가 아닌, 완벽한 자유를 얻은  존재의 모습을 그린 것과 같은 이 곡은 다양한 시공간의 예술이 하나의 통합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을 비롯한 여러 예술은 자연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은 일정한 모습은 갖추었지만 상당한 부분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을 자연과 상상력간의 대화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연을 감각적으로 인식하여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혁신적으로 바꾸어가며 자신의 음악어법으로 소화해 냈다.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이 아닌, 전총적인 색, 구도, 원근을 벗어나 어느 한 순간에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관념을 묘사한 드뷔시의 작품들은 독립적인 것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하나의 새로운 어울림과 같다. 회화에서의 점묘법과도 같은 드뷔시의 음악은 음색의 배열에 따른 새로운 원근감까지 총체적으로 느껴진다.

형태보다는 색채를 중시하고 눈에 비친 자연과 빛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그려낸 드뷔시의 ‘영상 제 2권’을 비롯한 피아노 작품에서 쌍윳따니까야 시구의 여러 가지 비유와의 접점을 찾아본다. 드뷔시는 빛, 물, 안개, 파도, 바람 등 온전한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자연의 시각적 이미지를 음의 움직임으로 나타내어 새로운 질감으로 묘사해 내며 인상주의라는 독특한 사조를 만들어냈다. 200여 년간 지속되던 전통적 화성을 벗어난 드뷔시의 모험적 진취성과 자신만의 치밀한 구성력, 밀도 높은 표현력을 쌍윳따니까야와 함께 감상해 본다면 어떨까. 특히 ‘영상 제 2권’ 의 세 곡은 하나의 완성된 불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39호 / 2020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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