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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암 4기 극복한 펜화가 김영택

“생의 벼랑 끝에서 108배로 만난 부처님, 펜화로 모셨습니다”

대장암 4기 항암치료에 무너진 몸 이끌고 미황사서 108배
6개월 만에 체력 회복 후 갑작스런 응급수술 계기로 암 제거
“가피 아니면 상상도 못할 일…절망 대신 삶에 최선 다할 뿐”

벼랑 끝으로 그를 밀어버릴 것 같은 병마를 미황사에서 기도로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김영택 화백은 “미황사와는 전생으로부터 지중한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포토그래퍼 김녕만씨가 미황사에서 촬영, 제공했다. 

고요한 달마산의 새벽을 ‘옴마니반메훔’ 진언이 깨운다. 응진당에서 퍼져 나온 목소리는 미황사 경내를 휘감고 달마산 솟은 바위를 내달아 울린다. 우렁차고도 간절한 소리에 돌아보지 않는 제불보살이 없으리라. 

펜화가 김영택씨가 미황사로 거처를 옮긴 것은 지난해 6월이었다. 전통산사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자 펜 한 자루 들고 전국의 산문을 수없이 넘나들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상행결장(대장)암 4기’ 판결을 받고 미황사에 발을 들인 그는 그저 환자였다. 

이미 복부까지 전이된 암은 수술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했지만 의사는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다. 2주 간격으로 2박3일씩 10번의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5개월에 걸친 치료 후 체력은 바닥났고 몸은 무너졌다. 지팡이 없이는 걸음조차 옮기기 힘든 지경이었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던 그였지만 고작 400~500m 걷기가 버거웠다. 더 이상 항암치료를 강행할 수는 없었다. 몸 추스를 곳을 찾았다. 평소 인연 깊던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이 새로 만든 주지실을 기꺼이 내주었다. 

금강 스님의 조언에 따라 식단부터 바꾸었다. 방목해 키운 소의 젖으로 만든 기버터, 천연 코코넛오일, 그리고 말차를 뜨거운 물에 섞어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가급적 밥을 줄이고 경내 텃밭에서 수북이 자라난 채소와 야생 민들레, 왕고들빼기 등을 따 먹었다. 좋아하던 초콜릿 등 주전부리도 그날로 끊었다. 

매일 새벽 4시반 응진당에 나아가 108배를 했다. 첫 날은 이를 악물고 108배를 채웠다. 꼬박 1시간이 걸렸다. 둘째 날, 고작 45배를 하고 몸져누웠다. 사흘째도, 나흘째도 108배는 불가능해 보였다. 계단 몇 개 오르기도 힘든 몸으로 처음부터 무리한 도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108배가 조금 익숙해지면서는 있는 힘껏 ‘옴마니반메훔’을 외치며 절을 했다. 고요하기 이를 데 없던 도량의 새벽이 매일 그의 ‘옴마니반메훔’ 소리로 깨어났다. 

그렇게 5개월여가 지나자 툭 튀어나와 있던 배가 쑥 들어갔다. 체중은 20kg 가까이 줄었다. 계단을 뛰어오를 수도 있었다. 이상 증세가 다시 나타난 건 그 즈음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픈가 싶더니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서울로 올라와 검사를 받았다. 암세포가 자리 잡고 있던 대장이 막혀 소장 안에 음식물이 쌓여있었다. 응급수술이 필요했다. 수술을 앞두고 담당의사는 세브란스병원 김남규 교수에게 환자의 상태를 알렸다. 항암치료 이후 체력이 회복됐고 특히 복부비만이 사라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장암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김남규 교수가 이틀 후 그의 수술을 집도했다. 

“나이도 많고 암 진행도 4기나 됐으니 의사로서도 쉽지 않은 수술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소장이 막혀 수술이 불가피한 상태였느니 개복을 하는 김에 암 제거를 시도해보자는 결정이었습니다. 6개월여 지속한 108배와 식이조절 덕에 수술하기에 딱 좋은 몸 상태가 만들어져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응급수술인 덕에 불과 이틀 만에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로부터 수술을 받는 행운까지…. 일부러 하려해도 불가능한 일들이 마치 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순식간에 이뤄진 겁니다. 가피죠. 가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9시간을 예상한 수술은 무려 12시간 만에 끝났다.  

“수술이 아주 잘됐습니다. 108배 하신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그에게 ‘108배 덕분’이라며 축하 인사를 건네던 의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복부에 전이돼 있던 암세포는 말끔히 제거됐다. 앞으로도 4, 5년 지속적으로 예후를 관찰해야 하지만 20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그에게 지난 1년은 기적 같은 시간, 아니 가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부처님을 다시 만난 기쁨을 첫 손에 꼽았다. 

미황사에 머무는 동안 달마산과 대웅보전을 다시 그렸다. 1997년 처음 미황사를 화폭에 담은 후 그동안 두 차례나 더 대웅보전을 그렸다. 한 번 그린 건물이나 풍경을 다시 그리는 일이 없었지만 유독 미황사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거듭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네 번째로 다시 그린 미황사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앉아계신다. 주지스님의 부탁도 있었지만 그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부처님을 그려 넣었다. 흑백의 펜화 속에서도 그가 조성한 부처님은 빛을 뿜어내는 듯 뚜렷하다. 

“아마도 전생에 인연이 있었겠지요. 한편으로는 내게 무슨 복이 있어 이런 가피를 입었을까 싶었어요.”
 

김영택 화백은 지금까지 모두 4차례 걸쳐 ‘달마산 미황사’를 화폭에 담았다. 앞서 세번의 작품과 달리 올해 새로 완성한 ‘달마산 미황사’(아래 사진)에는 대웅보전 안에  자리잡은 부처님이 선명하게 보인다. 2015년 작품(맨 위 사진)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굳이 인연을 찾자면 1995년 펜화가로 전향한 후 십수 년 이어온 보시다. 펜화는 작품의 특성상 원화를 이용한 다양한 미술품 제작이 가능하다. 판화뿐 아니라 달력, 소형 액자 등으로 만들어 인연 닿는 데로 보시했다. 미황사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펜화로 제작된 판화 수천 점이 불자들에게 답례품으로 전해졌다. 통도사, 범어사, 봉암사 등 그는 화폭에 담은 사찰들에도 아낌없이 보시를 실천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동안에도 제중원, 에비슨관 등 옛 세브란스병원의 건축물들을 그린 작품 13점을 각 100장씩 판화로 제작해 기증했다. 그의 보시행을 돈으로 환산(작가는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지만)하면 수십억 원에 달한다. 

“감사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내가 남에게 준 것이 결국엔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법이지요. 하지만 내가 1억을 주었으니 너도 내게 1억을 줘야한다거나 더 많은 대가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보시행에는 주었다는 마음조차 없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니까요.”

응진전 부처님 앞에서 그도 눈물로 호소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 어찌 없었을까. 하지만 한 번도 삶을 놓아본 적은 없다. 포기한다면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미황사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개인전을 열었다. 미황사 누각 자하루에 45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서 열던 전시회 못지 않은 규모였다. 작품 규모뿐 아니라 도록이나 전시관 수준도 역대 어느 전시회 못지 않았다. 관람객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어정쩡하게 해 본 적은 없어요. 전시를 마치고 곧바로 2020년 달력을 제작했습니다. 아내는 ‘병이 중한데 무슨 달력을 만드냐’고 만류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대원력을 세우고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다. 살아있는 동안 방일하지 않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태어난 자가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임을 보이셨다. 그 가르침에 온 마음으로 의지하고 실천했다. 결국 그를 고통으로부터 구했다.

 

 

"화폭 앞에선 ‘나’도 사라져야…화선삼매 이룰 때 진면목 담겨”
 

‘잘 나가던 디자이너’서  “내 작품 하고 싶어” 펜화가로 전향
생활고도 겪었지만 모방 거부하고 ‘한국 펜화’ 새 장르 개척
"경험·지혜 넓히고 오계 지키는  성장의 삶이 수행이라 여겨” 

 

지난해 12월 암 제거 수술로 입원한 기간에도 새해 달력 제작 등 활동을 멈추지 않은 김영택 화백은 수술 직후 600여부의 달력에 직접 사인을 해 배송하는 등 변함없는 일상을 이어갔다. 

김영택 화백의 펜화는 0.05mm의 예술로 불린다. 1mm 안에 다섯 개의 선을 그려 넣는 세밀한 표현을 통해 펜화를 새로운 예술의 장으로 탄생시켰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이전의 세계를 허무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다.

김영택 화백은 ‘잘나가는 디자이너’였다. 홍익대를 졸업하고 광고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광고디자인 외에도 제품디자인, 인테리어디자인에도 높은 안목을 보였다. 산업디자인의 최고봉인 ‘기업 이미지 전략 디자인’ 분야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며 외국의 디자인업계로부터 러브콜도 받았다. 1993년에는 세계적인 권위의 국제상표센터(ITC)에서 선정한, 전 세계 54명뿐인 ‘디자인 앰베서더’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최고’였다. 하지만 부와 성공을 이룬 것 같던 디자이너가 어느 날 ‘펜화가’라는 낯선 길을 선택했다. 
 

김영택 화백의 작업실. 금강 스님은 올해 초 새로 문을 연 청운당 백운실에 그의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다. 김영택 화백 사진제공. 
미황사 사천왕상 점안식에 초청한 장사익씨등 지인들과 대화 나누는 김영택 화백. 김녕만 포토그래퍼 사진 제공. 

▲‘잘 나가던 디자이너’가 ‘펜화가’로 전향한 이유는.
“1995년 벨기에서 열린 제1회 세계로고디자인 비엔날레에 초대돼 파리에 들렸을 때 루브르박물관에서 ‘구스타프 도레’의 펜화를 본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어려서부터 묘사력이 좋았는데 그때까지 마음속에 있던 스케치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산업디자인은 아무리 창의적인 결과물이라도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었다. 내 것을 하고 싶었다.”

▲펜화라는 장르가 낯설 때였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펜화가로 전향하고 수년간은 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펜화가로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존심만 있었지 솜씨도, 경험도 미치지 못했다. 작품을 위해 사찰에 갈 때면 경비도 아낄 겸 떡 한 덩이, 음료수 하나를 챙겨가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식당에 가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는 시간도 아까웠지만 공양간 찾아갈 정도의 주변머리도 없었다.”
수년간 펜화와 씨름하며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서양의 펜화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계승’이라는 이름의 아류가 될 생각은 없었다. 카메라가 발명되면서 사라진 서양의 기록펜화를 한국에서 새롭게 탄생시키겠다는 그의 목표는 이미 세계 최정상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시기였지만 그는 “스스로를 담금질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디자이너로 쌓아올렸던 성공의 세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그 위에 ‘김영택 류(流)’라는 새로운 펜화의 세계를 창조해갔다. 조금씩 그의 작품이 알려지며 2002년부터는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 등 영축총림 구석구석을 12장의 펜화로 담는 인연도 맺었다. 특히 중앙일보에 연재한 ‘김영택의 펜화기행’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바닷 속에서 어룡을 만났어요. 용이 다가와 뽀뽀를 하더니 입 안에 무엇인가 뜨거운 것을 넣는 거예요. 뭔지도 모르고 꿀꺽 받아 삼켰죠. 이틀 후 중앙일보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로부터 12년간 연재를 했고 펜화작가로서 명성도 얻었어요. 그런데 더 신기한 일은 미황사 대웅전에서 만났어요. 어간에 용 두 마리가 조각돼 있는데 한 마리만 여의주를 물고 다른 용은 여의주가 없는 거예요. ‘저 용이 나에게 여의주를 주었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명함에 미황사의 여의주 없는 용을 그려 넣었어요.”
운명처럼 다가온 변화였다. 2003년부터는 법보신문, 2004년부터는 주간조선 등에 잇따라 펜화를 연재했다. 펜화의 황금기가 열렸다. 
매주 돌아오는 연재 마감은 혹독했다. 쉼 없는 작업에 손목은 끊어질듯 아프고 팔꿈치와 어깨통증까지 심해져 팔을 들어 올릴 수도 없을 지경이 됐다. 하지만 고통이 쌓이는 만큼 작품은 늘어갔고 그의 펜은 더욱 견고해졌다. 독학으로 펜화를 시작한 만큼 펜을 다루는 기법과 도구 하나하나를 스스로 개척했다. 정밀한 표현이 생명인 펜화에 적당한 잉크, 펜, 종이를 직접 구하고 때로는 전문 업체에 제작과 수입을 의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펜화는 도구와 기술만으로 구축된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은 없다”고 단언한다.

▲펜화와 사진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펜화 속 모습이 사진과 다른 이유를 의아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다르다. 카메라의 렌즈와 인간의 눈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서는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 똑같은 선명도로 기록된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초점을 맞춘 대상의 중심부만 상세하게 보고 주변부는 흐릿하게 본다. 가까운 곳의 전각과 줌렌즈처럼 당겨서 본 먼 산을 하나의 장면으로 합성해 기억한다. 사람의 두뇌가 스스로 보정을 해 기록하기 때문이다. 특히 안구의 시세포는 색을 구분하는 원추세포가 600만개인데 비해 흑백을 구분하는 간상세포는 훨씬 많은 1억개다. 흑백 사진을 더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펜화 역시 흑백이므로 사진보다는 인간의 시각 특징이 더 두드러지게 작용한다. 펜화가 시각의 특성을 반영한 ‘김영택 원근법’을 따르는 이유다. ‘김영택 원근법’에서는 서양 원근법의 기계적 구성이 아닌 사람이 보고 기억하는 이미지를 재현해 사물과 자연물을 재배치한다. 이런 화풍을 ‘김영택 류(金榮澤 流)’라고 이름 붙였다.”

▲자신만의 펜화기술은 무엇인가. 
“일정한 것은 없다. 오히려 규정화 된 테크닉을 경계한다. 바위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형태와 질감, 느낌이 모두 다르다. 각각의 특징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바위를 그리는 테크닉을 고집하다가는 전혀 다른 바위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물이 갖고 있는 원래의 느낌과 형태, 특성을 담는 과정에서 정형화된 테크닉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사물이 갖고 있는 진면목을 전하기 위해서는 나조차도 없어야 한다.”

▲‘나도 없다’는 무슨 뜻인가. 
“‘화선삼매(畵禪三昧)’라고 말한다. 그리려는 대상과 화폭 위의 그림만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사이에 나라는 생각이 개입해서는 사물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다. 향을 담은 주머니에서 향냄새가 나고, 먹이 든 주머니에서 먹물이 나오듯 듯 내가 갖고 있는 향과 색, 생각과 모양이 내 눈과 손을 통해 대상에 투영된다. 이는 단순한 형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과 자연이 빚어내는 형태의 조화와 느낌, 그 기운까지도 화폭에 옮기기 위해서다.”

▲‘상(相)을 떠나야 여래를 본다’는 뜻인가. 
“버리고 비우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라미드 모양처럼 더 넓고 높게 확장시켜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경험과 지혜의 확장을 수평의 기반으로 삼고 그것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향한 수직의 성장을 병행할 때 이뤄지는 삼각형의 정점이 곧 수행의 지향점이라고 생각한다. 수직과 수평의 확장이 함께 이뤄져야 그 꼭짓점이 뚜렷해질 수 있다. 기반은 넓히지 않은 채 높이만 키우려 한다면 꼭짓점이 없는 수직의 막대기와 같다. 방향과 지향점 모두를 잃을 수 있다. 펜화가로서 끊임없이 공부해 펜을 연마하고, 채식 등 오계를 지키며 보시를 실천하는 것도 수직과 수평을 함께 성장시켜 더욱 정제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 과정이 나에게는 수행이다.”
노력을, 수행을 멈추지 않는 김영택 화백의 펜화 세계는 지금도 확장 중이다. 벼랑 끝 같던 순간에도 그는 머무르는 대신 진일보를 택했다. 병고 앞에서 오히려 새로운 삶의 문을 열었다. 한 걸음 더 넓어지고 한 뼘 더 높아진 세상을 만들었다. 그 정점에서 만난 부처님은 이제 그의 화폭에 나투었다. 0.05mm 펜 끝에 중중무진한 화엄의 세계 넉넉히 담아낼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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