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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깨달음’과 ‘둘이 아닌 법’

기자명 선응 스님

깨달음과 수행은 눈과 발이 돕는 것

초기경전, 윤회 떠나 열반 증득
대승불교, 공 깨달은 무주상심
화엄경 ‘두 가지 행을 끊는다’는
깨달음과 수행이 둘이 아니란 뜻

28장은 “‘미혹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은 단지 ‘무명’을 도울 뿐이다”이다. 규봉종밀(780~841)의 ‘원각경약소’ 내용이다. 

‘미혹한 마음’이란 ‘법원주림’에서 “술은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데 왜 다시 술을 마시는가?”라고 한 것과 같이, 근원을 잃고 자신과 타인의 과실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당대(618~907)의 ‘돈황변문집’에서 “잘 살펴서 모든 ‘미혹’을 깨쳐라”고 했다. ‘수행(修道)’에 대해서 인광법사(印光, 1861∼1940)는 ‘목적을 향해서 몸과 마음이 변화된 상태’라고 했다.

‘싯다르타’의 ‘고행’은 인도의 요가(Yoga)다. ‘호흡법(Pranayama)’으로 ‘몸과 마음이 집중된 상태(kundalini)’에서 ‘신과의 합일(Haqiqat)’이었다. 그러나 ‘부처님(佛陀, buddha)’이 ‘깨달은(boddhi)’ 후에 ‘수행’은 ‘지계(戒)’와 ‘마음의 집중(定)’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慧)’이다. 

‘혈맥론’에서 “‘부처(佛)’를 친견하려면 ‘견성(깨달음)’해야 한다. ‘본성(마음)’이 곧 ‘부처’다. 만일 ‘견성’하지 않으면, ‘염불’하고 ‘독경’하며 ‘지계’해도 이익 될 것이 없다”고 하고, ‘육조단경’에서는 “‘견성’한 사람은 주장해도 옳고 주장하지 않아도 옳으니, 가고 오는 것에 자유롭고,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어서 필요에 따라서 행하고 물음에 따라서 답하며, 널리 ‘화신(化身; 현상)’을 보고 ‘자성’을 떠나지 않으니 곧 ‘신통’이 자재하고 ‘삼매’에 유희하게 되는 것이 ‘견성’이다”고 한 것은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悟)’이 투철하지 않으면 ‘수행’이 어찌 참되겠는가? ‘깨달음’과 ‘수행’의 뜻은 마치 ‘기름’과 ‘불빛’이 서로 의지하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다”고 해석했다.

‘깨달음(悟)’을 ‘초기경전’은 ‘평온함과 통찰수행(止觀)’으로 법에 대한 ‘족쇄(자아, 계율, 의심)’를 버리고 ‘물질과 정신의 욕망과 어리석음’이 없어져 ‘윤회’를 떠나서 ‘열반’을 증득하고 ‘6신통(천안·천이·타심·숙명·신족·누진)’을 갖춘 아라한’이라고 하고, ‘아비담부파’는 ‘연각불(緣覺)’이라고 하며, ‘대승불교’는 ‘공·무상·무아’를 깨닫고 ‘무주상심’을 증득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깨달음’은 다 원만하다. ‘두 가지 행’을 영원히 끊는다”고 했다. 해석의 내용은 규봉의 ‘원각경약소’에서 ‘깨달음’과 ‘수행’이 ‘둘이 아닌 것’의 내용이다. 천태(天台智顗, 538∼597)의 ‘마하지관’에서 “‘교’와 ‘선’은 서로 의지한다”고 하며, 청량(淸凉澄觀, 738∼839) ‘화엄경소’에서는 “‘앎’과 ‘행’이 서로 돕는다”고 한 비유와 같다. 

29장은 “‘수행의 요점’은 단지 ‘범부’의 감정을 없애는 것이지 달리 ‘성인’이란 ‘분별’이 없다”는 내용이다. ‘서장’에서 대혜(大慧, 1089∼1163)선사가 ‘간화선자’ 이참정(李邴, 1085∼1146)에게 전한 법어다. ‘능엄경’에서는 “이 ‘마음’으로 원만하게 비고 원융한데 들면 느낄 대상이 없다. (중략) 만일 ‘성인’이라는 분별을 하면 곧 ‘삿된 무리’를 용납한 것이다”라고 했다.

서산대사가 “‘병’이 없어지면 ‘약’도 없게 되어 다시 ‘본래 그 사람’이다”고 해석했다. 즉, ‘대혜어록’에서 “‘부처님’은 ‘중생’의 약이다. ‘중생’의 병이 나으면 약도 사용처가 없다. ‘부처님’과 ‘마군’을 모두 버려야 이 단계에서 ‘대사인연(견성)’과 조금이나마 상응한다”고 한 내용이 이것이다. 

30장은 “‘중생’의 마음을 버릴 필요 없이 다만 ‘자신의 본성’을 물들여 더럽히지 말라. ‘정법’을 구하는 이것이 ‘삿됨’이다”이다. 

해석하시길 “‘버리는 것’과 ‘구하는 것’은 다 ‘염오(染汚)’다”라고 했다. ‘염오’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선법’에서는 분별해서 ‘한 마음’을 생기하는 것이다. 대혜선사가 “‘무심’이란 마음이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제법을 취해서 집착하지 않으며 일체 처에서 막히지 않고 흐른다. ‘염오’의 경계도 없고 ‘염오’가 없는 곳에 주하지도 않는다”고 한 말이다.

선응 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 sarvajna@naver.com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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