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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아와 혼 그리고 인격체

무아가 진리이지만 인격체로서 ‘나’는 존재

자아 설명은 일견 그럴듯해도 철학적으론 피해야 할 견해
영구불변한 아무것도 안 가졌기에 자아가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법적·도덕적 책임질 수 있는 공한 인격체로 존재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Self(자아), Spirit(혼), and Person(인격체)’ 이 세 개념은 구분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나 붓다의 무아론을 옳게 이해하려면 이 세 개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논의해 보아야 한다.

‘self’의 번역어로는 보통 ‘자아(自我)’가 쓰이는데, 우리 일상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실은 self는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동일하고, 또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참나에 해당된다. 붓다의 무아론은 그런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자아란 나를 나이게끔 하는 그것, ‘나’라는 말이 지시하는 그것, 나에게 있어서 결코 변치 않는 그것,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바로 그것 등으로 정의된다. 영혼을 믿는 서양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도, 또 이런 전통이 존재해 본 적 없는 우리에게도 영원불변 불멸한다는 영혼 같은 것의 존재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 어떻게 그런 완벽한 존재자가 있을지 헤아리기 어렵다.

나를 나이게끔 만들어준다는 변치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영혼이라고 답하면 쉽겠지만, 이것은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한다. 먼저 영혼의 존재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증명되어야 이 답이 옳을 텐데,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이름이 그런 것일까? 이름은 변할 수 있고, 또 동명이인도 많으니까 아니다. 내 몸일까? 몸은 먹는 음식과 나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니까 아니다. 내 고유한 생각일까? 특이한 감각, 감정, 또는 의지일까? 이 모든 것도 변하니까 아니다. 그러면 나의 유전자는? 유전자도 노화와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이런 모든 것을 모아놓은 전체(whole)가 자아일까? 부분이 끊임없이 변하는데 전체가 변치 않고 남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자아가 아닐까? 나의 의식작용 그 어느 것도 자아로서의 자격이 없지만, 그런 의식작용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근저에 있는 어떤 무엇이 자아가 아닐까? 힌두교의 아뜨만이 그런 것이다. 아뜨만은 이 모든 것의 기원으로서 그 자체로는 생각될 수도 또 개념화될 수도 없는 어떤 신비로운 실체이고 우리 존재의 기체이다. 이런 답변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철학적으로는 피해야 할 견해다. 요즈음 컴퓨터는 대부분 자기 모니터링(self-monitoring)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수행하고 있는 이런저런 기능을 스스로 지시하고 관찰하며 또 잘못된 기능을 스스로 수정하기도 한다.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기능의 수행을 위해 컴퓨터에도 자아가 있어야 하고, 또 의식을 가진 우리에게는 아뜨만 또는 참나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 원리(오컴의 면도날)를 위반하는 한 수 낮은 철학이 된다.

‘spirit’은 그 의미가 귀신(鬼神)과 가깝다. 서양영화에서 보는 혼령들(ghosts)이나 한국영화에 나오는 귀신이 spirit에 해당된다. 영어로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독주를 spirit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독한 술을 마신 사람이 마치 그 몸속에 귀신(ghost)이 들어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그런 술에 spirit이 들어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영원불변 불멸한다는 신과 영혼을 믿어온 서양인들은 조상의 혼(魂)이 흩어져 없어질까 염려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온 우리만큼은 이 spirit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서양에서도 영혼의 개념은 원래 ‘생명의 숨결’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psyche’로부터 유래한다. 사람이 죽을 때 “프-쉬-케”라는 마지막 숨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내곤 하는데, 옛 그리스인들은 이 마지막 숨이 나가면 사람이 죽기 때문에 그 숨을 생명을 유지하는 숨결로 이해했다. 그리스 철학자 상당수는 이런 숨결은 공기 중에 흩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윤회설을 받아들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영혼불멸설이 자리 잡아가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등장으로 윤회설을 뺀 영혼불멸설이 지난 2천 년 동안 서양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person’도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데, 나는 보통 ‘인격체’로 번역한다. 17세기 영국의 로크(Locke)가 밝혔듯이, 서양인들은 원래 이 말을 일종의 법률용어(forensic term)로 이해했다. 인격체는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행위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인격체로서의 자격이 있다. 코마에 빠진 식물인간은 법정에 설 수 없어서 인격체가 아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비록 그들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아직 인격체가 아니다. 요즈음은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도 가족이라고들 하지만, 이것들 또한 법적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인격체는 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성인(成人)은 대부분 법적으로 책임지는 인격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인격체 각각을 바로 그 인격체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인격체의 자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자아(self)와 인격체(person)의 차이를 모르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둘 사이의 차이는, 자아란 영원불변 불멸한다는 무엇이지만 인격체란 변할 수도 있는 존재자다. 그래서 우리는 직관적으로 아무도 다른 자아가 될 수는 없지만 세상 풍파를 다 겪고 나서는 성격 등이 많이 바뀌어 다른 인격체가 될 수도 있다는 데 동의한다.

붓다는 우리 개개인을 끊임없이 변하는 몸과 네 가지 의식상태(五蘊)가 모여 쉼 없이 변하는 묶음으로 설명했다. 영구불변 불멸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無我)가 진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무상(無常)한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래도 법적·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자아가 없어 공(空)한 인격체로 존재한다고 본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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