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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들의 야단법석

자주 걷는 편이다. 가는 길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충무로와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는 코스다. 중간중간 안행(雁行)을 하듯 줄지어 늘어선 오색연등을 곁눈질하면서 걷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압권은 전통연등축제가 열리고 있는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저마다 독창적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진지하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다. 겉모습은 우락부락한 사천왕상이지만 속마음은 천진난만한 동자승을 닮았다. 어느 순간 옹기종기 짝지어 앉아 있던 젊은 연인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야심한 시각이다. 캠퍼스 곳곳은 연등들이 벌이는 야단법석들로 왁자지끌하다. 아름답고 황홀한 풍경이다. 5월말과 6월 초 사이. 여름이라 하기엔 아직 이르고 계속 봄이라고 우기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도 아직은 늦봄의 밤이지 한여름의 푸른 밤은 아니다. 이런 계절의 건널목에서 우리는 한 달이나 늦은 부처님오신날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은은하게 빛나는 저 연등들처럼 제발 요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사납고 너무 시끄럽다. 모든 것은 너는 사납고 나는 시끄럽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작금의 사태는 우리가 이미 인간적 품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만든다. 92세나 되는 전쟁피해자 할머니가 지금까지의 활동을 전면부정하는 기자회견을 열어야 하는 상황은 누가 봐도 볼썽사나운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도 탓하지 말자. 우리가 함께 지은 공업(共業)의 결과일 뿐이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우리 이제 감히 약속할 것을 제안한다. 나부터 먼저 상대방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자. 그리고 서로 지켜보고 응원해주자. 부처님오신날의 연등은 우리들의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그윽하게 비춰주는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밤이 깊어지자 자꾸 감상이 피어오른다. 남산의 밤과 동악의 연등은 마치 하나의 톱니바퀴라도 된 것처럼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 한쪽은 깊어가고 다른 한쪽은 더욱 불타오른다. 부처님오신날의 연등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발원해 보았다. 

벌써 33년이나 지난 일이다. 장안동에 있던 동대부중으로 교생실습을 나갔었다. 그즈음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겹쳤던 모양이다. 수업은커녕 매일 법당에서 종이연등을 만들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그해 봄, 학교 인근의 중량천 강둑에는 유독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교생실습생들끼리 틈만 나면 개나리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내 눈에 띄었던 노랑머리 여자교생이 있었다. 노란색의 가디건도 자주 입고 다녔다. 다소곳하고 예뻤다. 며칠을 뜸 들이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말을 걸었다. 조금씩 가까워졌고 점차 사귀는 관계로 발전했다. 교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만나다가 3년 뒤에 결혼했고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 아들도 하나 뒀다. 한동안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노란 장미만 사달라고 했던 것 기억이 난다. 부처님오신날 연등 이야기를 하려다가 집에 있는 노랑보살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밤이 점점 더 깊어간다. 새벽이 얼마 남지 않은 눈치다. 연등들은 마치 자기 몸을 몽땅 태워서라도 밤새도록 세상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기세다. ‘현우경’에 나오는 가난한 여인 난다의 빈자일등(貧者一燈)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연등을 밝힐 기름을 살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가난한 여인 난다의 표정이 애처롭다. 우리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자신과 세상을 밝히겠다는 서원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5월은 아직 봄이라고 부르고 싶다. 가는 봄은 천천히 가고 오는 여름은 나중에 오라. 나이가 드니까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 봄이 더디게 가고 여름이 오기를 잠시 망설이는 이 순간만이라도 온 세상이 두루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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