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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과 재건의 역사 불사] 4. 불사를 후원한 공덕주 보살들

최고급 요정·극장·농장 보시…근현대 불교 대작 불사 가능케 해

사찰 중창건에 힘쓴 공덕주 보살 근현대 불교사 끊임없이 등장
보육원·장학회 설립 등으로 이어지며 불교의 사회화 이루기도
공덕주 보살들 기억하고 찬탄해야 보시바라밀 문화 확산될 것

공덕주는 불·법·승 삼보에 공양하는 시주를 뜻한다. 한국불교의 든든한 기반이 된 공덕주 보살을 기억하고 찬탄하는 일은 또다른 대보살의 등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불사 없는 절은 없다. 기존에 있던 전각이나 구조물 혹은 시설물을 수리하거나 교체하는 경우도 불사요, 절을 새롭게 중창하는 것도 불사다.

오래전부터 사찰 불사는 스님이나 신도들이 화주보살이 돼 불사금을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원불사를 위해 건물을 해체하거나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보면 누가 언제 무슨 연유에서 시주를 했으며 화주는 누구에 의해 이뤄졌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사찰과 다양한 성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도 왕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발원을 담은 불자의 시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에 와서도 사찰불사는 불자들의 화주에 의해 이뤄진다. 화주자는 공덕주(功德主) 보살이라 불리기도 한다. 공덕주는 불‧법‧승 삼보(三寶)에 공양하는 시주(施主)를 뜻하는데 기도와 염불수행은 물론 사찰불사에도 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공덕주 보살 덕분에 숭유억불 시대인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깨달음과 중생교화에 진력한 실천가인 공덕주 보살은 근현대 불교사에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찰불사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근현대 공덕주 보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김영한(1961~1999, 길상화) 보살일 것이다. 서울 성북구에서 당대 최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던 김영한 보살은 1987년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다가 불현듯 대원각을 시주해 사찰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법정 스님은 김영한 보살의 간곡한 청을 10년 만에야 받아들였고 1997년, 7000여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동 등 1000억대 부동산은 청정도량 ‘길상사’로 변모됐다. 술과 고기, 성과 향락, 밀실정치의 대명사였던 대원각이 사찰로 탈바꿈한 것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14일 봉행된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법정 스님은 김영한 보살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가난에 내몰린 기생으로, 백석의 연인으로, 사업가로 폭풍 같은 삶을 살았던 그는 지금도 길상사 창건 공덕주 ‘길상화’ 보살로 많은 이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김부전(1922∼1973, 법련화) 보살은 조계총림 송광사 대작불사의 화주보살로 지금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일제강점기, 한국불교 위상확립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재물을 아낌없이 희사했던 그는 1941년 금강산 정양사 법당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 한 구절을 들은 직후 불교에 귀의했다. 김부전 보살은 아낌없이 나누고 희사하는 보시바라밀 실천자였다. 50~60년대 복지시설이 미약한 시절, 불교계 최초로 불교양로원과 보육원을 설립해 갈 곳 없는 노인들과 부모 잃은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줬다.

김부전 보살은 효봉 스님을 평생 마음의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수행자는 가난해야 하며 물건을 적게 가져야 조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스님의 무소유 가르침을 받들었다. 이후 극장을 운영하며 모은 재산을 불교와 사회를 위해 나누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적극적인 신행활동을 전개했다. 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 서울 선학원 마야부인회 회장 등 신행 단체 대표직을 맡으며 각종 불사에 자신이 모은 재산을 보시하는 일에 앞장섰다. 지금은 사라진 조계사 불교정화기념회관 건립에 앞장섰고 양주 흥국사 중창불사, 육군사관학교 화랑 호국사 법당 건립에도 큰 힘을 더했다. 임종 전 서울 종로 자택과 극장을 정리, 3000여평의 땅을 마련해 송광사 서울 분원인 법련사가 건립될 수 있도록 기증했다. 또 ‘불일 장학회’의 전신인 ‘부전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한국불교의 크고 작은 불사에 관여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효봉 스님을 통해 송광사와 인연 맺은 김미희(1920∼1981, 불국생) 보살은 김부전 보살과 함께 송광사 불사를 일으킨 두 축이었다. 김미희 보살은 전통 사찰의 복원 및 도심 포교당 건립, 경전 불사, 도제 양성 등 불교미래를 일궈낼 대작불사에 주력했다. 30년간 누적된 부채를 일시에 정리해 매각 위기에 처한 남원 실상사를 조계종으로 귀속시키고 진입로 정비, 전기 가설 등 사찰로서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백제불교 초전법륜지인 서울 대성사 중창과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구미 도리사 부근 모례장자의 집터를 매입해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대흥사 일지암을 복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미희 보살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경 효봉 스님을 통해 송광사와 인연을 맺고 500만원을 불사금으로 시주했다.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1967년에는 송광사 중창 프로젝트의 화주보살로 나서 화엄전 복원 불사까지 전담했다. 문경 봉암사 불사로 젊은 스님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한편, 서울 불광사와 대각사 룸비니 회관 건립에 시멘트와 철근을 무상으로 제공해 도심포교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장봉옥(1904~1981, 대보화) 보살은 서울 동작구 상도선원 창건에 지대한 역할을 한 공덕주다. 그는 해방 이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모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 건립 불사에 나섰다. 이를 위해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2만평 부지를 매입했으며 1961년 현 상도선원의 모태인 백운암이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는 막대한 재력을 기반으로 불교계 안팎으로 각종 불사를 전개해 이미 불교계에서는 ‘불사를 많이 일으킨 화주보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장봉옥 보살의 불심은 재력을 사회에 회향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백운암 건립 시 인근에 ‘나라사랑반’이라는 명칭으로 160여채 규모의 연립주택을 지어 전몰군경 유가족과 갈 곳 없는 이들에게 제공했으며 부설기관으로 노인대학을 만들어 복지와 사회봉사를 이끌며 사회의 귀감이 됐다. 백운암을 창건한 3년 뒤인 1964년 무렵에는 상조장학회를 조직해 청소년과 청년 및 지역 곳곳의 소외이웃에게 자비 손길을 전하며 여성불자들의 보살행을 주도했다. 장봉옥 보살은 한평생 재산을 희사해 음으로 양으로 보살행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스님들을 각별히 모시며 불법을 배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불자의 사표였다.

부산 불교계의 대화주였던 하말분(1923~2015, 도명화) 보살은 범어사 동산 스님, 통도사 구하, 경봉 스님 등 대덕 스님들의 가르침 아래 불법 인연을 굳건히 했다. 한국전쟁 정전 후 국내 최초의 아파트인 신창아파트를 건립, 아파트 임대업과 함께 보시를 꾸준히 실천했다. 특히 청소년 포교 원력으로 1988년 불심홍법원을 창립, 인재 불사를 전개했다. 무엇보다 불심홍법원의 기본재산을 부산불교신도회에 기부해 부산불교신도회관의 건립 계기를 마련했다. 또 신창농장 부지로 부산 대표 전법도량 홍법사 창건 기틀을 마련하는 등 포교를 위한 대작불사를 아낌없이 전개했다.

전북지역 불교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이순례(1917~2001,실상화)보살도 빼놓을 수 없다. 순천 송광사, 인천 용화사, 예산 수덕사, 전주 남고사, 익산 남원사, 김제 금산사, 완주 송광사 등 수많은 사찰에 부처님을 조성하고 탑을 세우는 등 각종 불사에 앞장서 설판시주를 담당한 이순례 보살은 전주시 덕진구 소재 부지를 시주해 전북불교회관 건립 계기를 마련하는 등의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며 보살도를 보여줬다.

제주 관음사는 재가불자 공덕주로 인해 명맥이 이어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4년 시작된 대웅전 중창불사는 재일교포인 대원각 보살과 윤해탈인 보살의 시주로 시작됐다. 이후 대자행, 윤순실, 김혜정, 문대선행 보살 등의 시주로 지금의 관음사가 사격을 갖출 수 있었다.

제주 관음사는 매년 6월 첫째 주 토요일이면 ‘재가공덕주 추모법회’를 봉행한다. 교구본사인 관음사는 물론 소속 말사의 위상 격상에 ‘혁혁한 공로’가 있는 재가자를 지속적으로 심의·선별해 재가공덕주 명단에 포함시키는데, 현재 100여명에 이른다.

이밖에 청암사 불사 대시주자로 알려진 김천고 설립자 최송설당(1855~1939), 법주사·불국사·부석사 중수불사를 이끌었던 이한열(1883∼1934, 복덕월) 보살 등이 무주상보시를 실천해 찬사를 받았다.

사찰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한 공덕주 보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공덕을 칭송하는 비문의 글귀, 다시 남겨진 신문기록을 제외하고 사실상 기억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단편적인 기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바로 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대보살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불교계가 이들을 기억하고 찬탄해야 한다. 그럴 때 대승불교의 으뜸인 보시바라밀 문화가 확산되고 한국불교의 든든한 기반이 돼줄 또 다른 대보살들도 등장할 것이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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