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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가수 ‘최고의 남자’ 나현아

힘들고 어려운 삶의 구비마다 햇살 같은 부처님의 가피가 내렸다

신인가수 등용문서 대상 수상 뒤 데뷔…일본 국내 오가며 가수활동
독실한 어머니의 인연으로 불연… 조계종 문화부 홍보대사로 활약
백담사서 한때 출가의 꿈…낙산사 불사 동참, 계조암서 100일 기도

불자 가수 나현아씨는 불자들이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찬불가를 만들겠다고 서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은 강제적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불자가수 나현아의 하루는 오히려 더욱 분주해졌다. 코로나19 극복을 염원하는 불자들을 위해 일주일에 5일은 소원지 달기 도우미 활동으로 낙산사에 오르고 나머지 시간은 나현아를 찾는 팬들을 위해 유튜브 채널 ‘NHA나현아’를 제작 방송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계속된 공연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모든 일정이 공중에 붕 떠버렸지요. 가수로서 팬들과 만날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그래도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낙산사에서 소원지 달기 도우미로 참배객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트렌트인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지요.”

그는 “갑작스런 사회적 변화가 오히려 가수로서의 초심을 돌아보게 하고 또한 불교에 대한 배움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며 “지금의 삶에도 감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7년 노래 ‘불모지’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그의 주요무대는 일본이었다. 바지런히 교민 행사에 참석하고 재일본 대한민국 민간동포 위문 공연, 조선통신사 400주년 기념행사 등에 참여하며 존재감은 키웠다. 2008년 귀국해서는 극단 ‘가인’에서 배우로 활동했으며 2014년 ‘오늘밤은’이라는 곡을 발표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곡은 창작인이 뽑은 가수상, 대한민국 충효대상, 기자가 선정한 인기가수상 등을 수상했다. 2017년에는 ‘최고의 남자’를 발표하며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불교와의 인연 또한 노래만큼 지중하다. 부처님과의 인연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어머니는 신심이 깊으셨다. 부처님이라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섰다. 무엇보다 화주에 일가견이 있었다. 남에게까지 화주를 권선하는 일은 불사를 내일처럼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사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며 자연스레 불자가 됐다. 특히 스님들이 그리 좋았다. 어린 나이에도 스님들과 있으면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등학교 무렵, 이웃종교 여름학교 전단지를 보고, 스님들을 졸라 절에서 여름학교를 열었다. 친구들을 데려오면 해주겠다는 스님의 말에 친구들을 구슬려 기어이 여름학교를 열었다.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었지만 찬불가를 부르고 절하고 법문 듣는 것만으로 하루가 짧았다. 중학교 때는 경주에서 울진으로 간 어머니를 따라 방학 내내 불영사에서 지냈다. 도량의 품은 언제나 넉넉했고 부처님의 미소는 항상 자애로웠다.

누구나 그렇지만 그의 삶에 항상 햇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행복한 유년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부모님은 맺은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시련에 방황이 시작됐다. 전교생이 설악산으로 수행여행을 떠나던 날, 그는 조용히 짐을 정리해 백담사로 향했다. 스님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절은 그렇게 자신을 품어줬다. 스님의 그 묻지 않음이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됐다. 한 달간 지내다보니 시나브로 출가의 꿈이 익어갔다.

나물을 캐오라는 스님의 말씀에 산에 다녀왔더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께서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신 것이다. 출가의 뜻은 확고했다. 말리고 말리던 어머니는 출가를 허락했다. 대신 조건이 붙었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님도 추임새를 넣었다.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출가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향했다. 처음엔 법조인을 꿈꿨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다. 목숨 걸고 공부했지만 생활고는 끝까지 풀리지 않은 숙제였다. 당시에는 생필품을 경품으로 내건 가요제가 많았다. 생활고에 우연히 참가한 가요제에서 큰상을 받았다. 이런 일들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숨겨진 재능의 발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인가수 등용문에 참가해 태진아의 ‘사모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가창력을 높게 평가했다. 가요계 데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대상과 함께 받은 상품은 자동차였다. 그런데 우연찮게 동생이 자동차와 관련해 불미스런 일에 휘말렸다. 다행히 경품으로 받은 자동차로 해결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부처님께서 미리 알고 가피를 내려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는 어린 딸이 있다. 그러나 엄마로서 양육과 무대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항상 힘에 부쳤다. 당시로서는 여가수가 자녀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어린 딸을 울진 어머니에게 맡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를 향해 가던 날 대형사고가 났다. 차가 낭떠러지에서 구른 것이다. 오로지 관세음보살님만을 찾았다. 제발 아기만은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차가 폐차될 정도로 사고는 컸다. 그러나 그와 딸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그의 삶에 부처님의 가피는 또 이렇게 이어졌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2008년 한국에서 전화가 한통 왔다. 낙산사 주지 금곡 스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금곡 스님은 낙산사에서 기도하며 법당 일을 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타향살이에 지쳐있던 시절이었다. 그날로 짐을 싸 낙산사로 향했다. 매일 공양과 법회준비, 청소 등 법당 관리 일을 했다. 돌이켜보면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낙산사는 2005년 입은 화마를 극복하기 위한 불사가 한창이었다. 

“금곡 스님이 법당보살을 권했을 때 고민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도 한겨울 난방도 되지 않는 법당을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어요. 낙산사는 화재에 민감한 곳이라 난방 없이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낙산사의 복원불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매일이 행복했습니다.”

법당일도 보람 있었지만 하루를 온전하게 기도에 매진하지 못하는 상황이 항상 빈 구석처럼 시렸다. 금곡 스님께 말씀드렸다. 스님은 설악산 계조암에서 100일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안거 입재에 맞춰 매일 낙산사에서 계조암으로 향했다. 기도하는 동안 묵언했다. 가끔 비로 인해 산이 통제가 되면 국립공원 직원들에게 메모지로 글을 써서 알려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다. 그렇게 100일 기도가 끝나고 마지막 일주일은 아예 계조암에 머물며 매일 3000배 정진을 했다.

“100일 기도가 마무리될 무렵 생일을 맞았는데 우연히 아침공양에 찰밥과 미역국이 함께 나왔어요. 기도 잘하고 있다고 부처님께 생일상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나에게 참  많은 사랑을 주시는구나하는 마음에 혼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순탄치 않다. 돌아보면 구비 구비 눈물이다. 그의 삶은 더욱 그랬다. 남들보다 몇 구비는 더 있었다. 그래서 흘린 눈물도 많았다. 혼자만 힘들고 고통 받는 것 같아, 삶을 원망한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는 항상 그를 품어주는 넉넉한 그늘이 있었다.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가 겪었던 숱한 고난은 어쩌면 더욱 단단한 신심과 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부처님의 조화였을 것이다. 스님들의 격려와 불자들의 사랑이 그와 함께 하는 이유다. 

조계종 ‘문화부 홍보대사를 맡아 달라’는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오심 스님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꿈은 인연된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일이다. 그리고 불자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찬불가를 만들겠다는 서원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의 환한 미소 속에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소가 오버랩 되는 것이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김내영 기자 ny27@beopbo.com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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