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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이생은 물론 다음 생도 한 가지 발원은 포교사로서의 삶

기자명 법보

포교원장상 - 이을선

불광사와 인연으로 불교 귀의, 전법 생활화 위해 노력
폐암으로 남편 보낸뒤 군포교로 다시 살아갈 용기얻어
힘든 인생의 고개, 도반들 응원과 부처님 가피로 극복

그림=육순호

나의 종교는 원래 모태 신앙이었다. 어머니가 전남 강진에 위치한 무위사라는 절에서 8년을 기도한 끝에 나를 잉태하셨다. 그렇게 나는 세상과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기도 공덕과 부처님의 가피로 이 땅에 오게 된 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1997년 서울 잠실에 소재한 불광사라는 절과 인연을 맺기 전까지는 어머니를 따라, 혹은 이모를 따라 초파일에만 절에 다니는 초파일 불자에 불과했다. 심지어 1990년 결혼해서는 교회 장로로 있는 외사촌 언니를 따라 교회도 갔었다. 그렇게 종교적 방황을 거듭하던 중 시간만 나면 절에 가는 그런 시누이를 보며 “도대체 절에 가면 뭐가 있길래 저리도 열심히 갈까”라는 의구심과 호기심도 들었다. 그런 연유로 사실 지난 1996년 불광사를 찾았지만 그때 뿐, 법회를 몇 번 다니다 말았다. 그러다 1998년 IMF로 남편이 하던 자영업이 실패하자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나는 집 근처에 있는 불광사를 다시 찾게 되었고 불교에 귀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나의 상황은 남편의 자영업 실패, 병환 중이신 친정 아버지의 병 구환 등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불광사에 다니는 큰아이 친구 엄마를 만나 “절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불광사에는 다른 사찰과 다른 조직문화가 있다. 

큰아이 친구 엄마는 본인이 속해 있는 구법회 법등 대표인 마하를 모시고 집을 찾아와 법등에 가입하고 바로 법등모임을 제안했다. 법등모임을 하면 집안이 평안하도록 기도해준다는 말에 법등에 가입하고 우리 집에서 법등모임도 가졌다. 법등 소속의 도반들이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는 염불 소리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다시 찾아간 불광사. 당시 지하 보광당의 부처님을 뵙고 왠지 모르는 서러움과 안도감, 위로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때 법당에 남몰래 하염없이 쏟아낸 눈물은 지금 생각하니 종교적 방황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었다. 남편의 사업실패 이후 음식점을 차렸다. 그러나 경험도 없이 시작한 음식점은 빚만 덩그러니 남긴 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기에 남편과 나는 다시 취업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던 중 같은 구법회의 한 도반님께서 같이 새벽기도를 다니자고 제안을 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새벽기도를 다녔다. 남편과 함께 열심히 일을 했고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가정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형편이 나아지자 나는 조금씩 나태해져 매일 다니던 새벽기도를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큰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며 다시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대학을 입학할 때까지 무려 6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녔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다시 찾은 불광사에서 나는 법등 활동을 하며 도반들과 같이 열심히 기도했다. 이제야 나에게 맞는 옷을 입었다는 마음에 신심도 생겨났다. 친정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도 도반들은 내 일처럼 도와주었고 식당일을 할 때도 찾아와 기도해주는 것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던 중 한 도반이 사다 준 책 ‘메아리 없는 골짜기’라는 책을 읽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 궁금해졌고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게 2000년부터 불광사에서 불교 기본교육과 불교대학, 불교대학원 과정까지 이어서 공부를 했다.

불교대학 졸업 후에는 봉사를 시작했다. 불광교육원에서 불교 기초교육 및 불교대학 교육생들의 수업 뒷바라지와 함께 송파구립요양보호센터에서 설거지 및 식사 수발 봉사를 했다. 

그러다가 불광사 신도 기초조직인 법등의 ‘마하’의 소임을 맡게 됐다.

마하 소임을 맡으며 나는 “전법을 하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바쁜 직장생활로 기도 등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는 법등 식구들을 위해 백중기도, 하안거, 동안거 등 중요한 기도입재가 있으면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지” 등의 기도 숙제를 내서 우편 발송해줬다. 마하 소임을 수행하며 전법에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내가 힘들어할 당시 나를 새벽기도로 이끌어 주었던 도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전법을 통해 부처님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선 우리 가족부터 전법을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로 세례까지 받은 남편을 설득해 불광사에서 기본교육을 받게 했다. 또 두 아이도 기본교육도 받고 수계도 받았다. 특히 둘째 아이는 유치원 때부터 나와 함께 불광사를 다닌 도반이다. 둘째 아이는 유아법회, 학생법회 회장을 역임하고 학생법회 지도교사를 하다가, 군종병으로 군 생활을 마친 나의 훌륭한 도반이며 선지식이다. 법등임원 소임을 마치고 구법회 총무 소임을 거쳐 명등 소임까지 맡았다. 명등 소임을 맡으며 나는 “△열심히 전법하고 수행하겠다 △우리 구법회 도반들을 부처님으로 모시겠다 △하심, 또 하심하여 나로 인해 상처받는 분이 없도록 하겠다”고 발원했다.

명등 소임을 하면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구법회 가족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를 했다. 특히 다른 구법회 식구들보다 어린 나이에 구법회 수장인 명등 소임을 맡게 된 터라 욕을 먹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했다. 힘든 일이 있는 도반이 있으면 함께 고민하며 위로하고 해결책을 찾았다. 또 아픈 도반이 있으면 쾌유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3개 법등으로 시작된 구법회 모임은 열심히 전법을 한 덕분에 명등 소임을 회향할 당시 4개 법등으로 구법회 도반들이 늘어났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주말과 퇴근 시간 이후를 전법과 봉사, 종교 활동에 매진했다. 처음 구법회 명등 소임을 맡을 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2년만 열심히 명등 소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끝난 뒤 당신을 부처님처럼 모시고 살겠다”고. 직장에서 퇴근 후 나는 신랑과 아이들의 저녁상을 차려놓고 구법회 모임에 나가는 등 명등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남편과 아이들은 이런 나를 이해해줬다.

이런 가운데 한 도반의 권유로 포교사 시험을 보게 되었다. 두어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혼자 공부해서 합격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대학에서 교육봉사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2013년 포교사 시험에 합격했다. 6개월 동안 포교사 연수 후 품수를 받은 뒤 군 법당으로 포교활동을 다녔다.

주말이면 전날 군 장병들 간식 준비와 법문 준비를 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남편과 아이들이 먹을 아침밥을 준비해 놓고 그렇게 군 법당을 나가야 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즐겁고 가벼웠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에서 모두 장미꽃을 뿌려놓은 꽃길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IMF로 진 빚도 조금씩 갚아가고, 가정생활도 안정이 되어가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이어지던 2013년 11월 22일, 남편과 건강검진을 함께 받게 되었다. 건강검진에서 남편은 폐 조직의 이상이 발견되어 재검사를 받았고 ‘폐암 3기’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검사결과를 통보받았다. 

그러나 부처님이 계시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남편을 기어코 건강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다짐을 했다. 부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죽을힘을 다해 기도하면 암을 극복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투병 기간 동안 응급실에 수없이 실려 가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위험한 고비도 넘기기를 반복했다.

나는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저녁에는 퇴근해서 병원에서 간호하면서도 매일 새벽 병원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남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스님의 임종법문을 듣고 병원에 다시 입원한지 5일 만에 가족들 기도 소리를 들으며 부처님 곁으로 돌아갔다. 부처님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약속을 채 지키기도 전에 허망하게 떠나갔다. 울지 말고 남편을 보내드리자고 다짐을 했건만 눈물은 속절없이 흐르고, 무슨 정신으로 장례식을 치렀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렇게 황망하게 남편을 보냈다. 남편과 함께 했던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이제 그 무게를 오롯이 나 혼자 떠안은 순간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됐다. 곡기(穀氣)는커녕 물 한 모금조차 넘길 수 없었다. 심지어 매일 남편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내가 흔들리고 주저앉는다면 내 아들들은 어찌 살아갈까”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가? 수없이 반문하면서 나를 돌아보며 참회했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 택한 것이 명상이었다. 명상을 하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힘들어하는 나를 달랠 수 있었다. 남편 떠나보내고 나 혼자 직장생활을 하며 받는 월급만으로는 두 아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할 수가 없어 다시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식당 운영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힘든 시절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에서도 나는 매일 아침 잊지 않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어렵게 끌어가던 식당 경영은 개업 2년 만에 결국 보증금, 권리금 등 모두 다 날리고 폐업을 했다. 내가 이렇게 굽이굽이 굴곡진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내 곁에는 늘 부처님의 가르침과 도반들의 따뜻한 위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과 도반님들께 은혜 갚기 위해서 힘들어도 오뚝이처럼 열심히 살아야 했다.

큰 고난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불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은 신심(信心) 때문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그 아픔은 나 자신을 내려놓게 했고, 겸손하게 했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또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지나온 나의 삶을 반추해 보고 참회도 하게 되었다. 명상을 하면서 나 자신도 돌아보고,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관(觀)할 수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련도 내 삶에서 이유가 있는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굴곡진 인생길에서 만난 그 고통도 어쩌면 내 안의 보리(菩提)의 씨앗을 피우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몸 받고 부처님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의 내가 너무 행복하다. 비록 시련이 있었지만 부처님을 향한 기도로 이겨낼 수 있었기에 다음 생에도 부처님의 제자로 태어나고 싶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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