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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코로나로 절에 갈 순 없지만 더 지극해진 신심과 가까워진 불자들

기자명 법보

불교방송 사장상 - 김영화

코로나로 이목 집중된 대구, 아파트 밖에선 구급차만 요란하게 오고가
온 생명 지켜주십사 기도하다가 문득 인터넷 접속해 스님들 법문경청
감염병 유행에도 이기적인 종교와는 달리 타인 먼저인 불교계에 감사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코로나19로 인해 대구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나는 그 대구에 살고 있다. 불교와 인연이 닿은지는 십여년 남짓 되었지만 유명하다는 사찰을 찾아 기도하는 정도였다. 동화사 대구불교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한 적도 있었지만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남편의 암 수술과 병간호를 핑계로 중퇴했다. 다니는 절을 정해 놓고 신행 생활을 한 것은 삼 년쯤 되었나 보다. 

요즈음은 남편의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고 아이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기도에 대한 회의가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절에 갈 때마다 기도했지만 법당을 나올 때는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에 개운하지 않았다. ‘법화경’ 사경도 해보았지만 깊은 뜻을 알지 못하여 그저 필사에 그쳤다. 기도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도대체 기도는 왜 하는 건지 무엇인지 다시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 감염병이 대구를 덮쳤다. 대구에서는 2020년 2월18일 처음으로 확진자가 발생했다. 전국 확진자 통계로는 서른한 번 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 명쯤이야 뭐’ 하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로는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수십 명, 수백 명의 확진자가 생겼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구급차 소리가 제일 먼저 들려왔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스마트폰을 타고 퍼졌다. 마치 전염병처럼 말이다. 텔레비전에는 대구 전염병 이야기가 가득했다.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대구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내남없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암 수술 후 면역력이 예전만 못한 남편 걱정으로 나는 늘 노심초사했다. 외출했다가 온 날은 재채기만 해도 코로나19 감염인가 싶어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썼다. 온 집안을 소독약으로 닦고 또 닦아도 마음에 남아 있는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었다.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 가족과 대구시민을 지켜 주십사 저녁마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막무가내로 기도하던 중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방송과 인터넷 방송을 찾아보았다. 법문이 너무나 많이 올라와 있었다. 인터넷 방송에서는 일상에 도움을 주는 가벼운 법문을 즐겨 들었고 불교 공부에 대한 묵직한 법문은 불교방송에서 찾았다. 반찬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할 때 습관처럼 법문을 들었다. 법문을 계속 듣다보니 어설펐던 믿음이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법문을 등한시하고 기도에만 치중하였기에 나의 신행 생활은 뿌리가 약했던 모양이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잎이 시들기 마련인 것을. 부처님 법이 진정 무엇인지 배울 생각은 제쳐두고 욕심 채우는 기도만 했으니 열매가 영글기 만무하지 않았겠는가. 

합장 인사가 개인 간의 방역이 되는 인사법이 될 수 있음도 법문을 듣고 알게 되었다. 부둥켜안거나 손을 잡지도 않거니와 저절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니 요즘 같은 때에 딱 맞는 인사 예절이 아닌가. 새삼 합장 인사가 더 없이 아름답고 자비롭게 보였다. 더구나 고요하게 마음을 모아서 상대방에게 충분한 예를 갖출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인사법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릴 때 여름방학에는 엄마를 도와 김장 배추와 무를 심었다. 엄마는 정종을 담았던 긴 병을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병의 키만큼 간격을 띄우고 병의 밑동으로 흙을 살짝 누른 후 씨앗을 넣으면 엄마가 뒤따라오시며 흙을 덮었다. 거리를 둬야 배추가 다 자랐을 때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람 사는 공간도 그렇게 적당하게 떨어져야 하지 않을까. 너무 가깝게 되면 생각을 거를 틈도 없이 다가가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 합장 인사는 자연에 가장 가까운 인사법이 될 수도 있겠다.

감염병의 대유행에 대처하는 몇몇 이웃 종교인들의 모습은 불교와 사뭇 달랐다. 코로나19 감염병 때문에 온 세상이 불안감에 싸여 있는 때에 밀집된 공간에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보았다. 그것 때문에 여러 사람이 감염되기도 했다. 뉴스를 본 사람들은 또 얼마나 놀랐겠는가? 어떤 종교이든 사람이 바탕이 되어야 하거늘, 정녕 무엇이 사람을 위한 일인지 종교인이 아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답답했던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교는 달랐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타는 내내 불교 만큼은 철저히 타인을 먼저 배려하려는, 모두가 함께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일관되었다. 그것이 진정한 배려이자 자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심뿐 아니라 산중에 있는 절집까지 모두 법회를 중단하고 코로나19의 확산 방지에 마음을 보탰다. 

금강경 제14분 이상적멸분에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라는 구절이 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코로나19가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지금, 방역 수칙을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도가 아닐까. 그것이 바로 자비의 참 모습은 아닐까. 누군가의 강요에 못 이겨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절집을 잠시 닫았으니 불자들 모두가 보살도를 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기도와 수행은 전혀 다른 신행 생활이라고 여겼다. 절에 갈 수가 없어서 집에서 기도를 해 보니 기도도 수행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천수경’ ‘금강경’ ‘반야심경’을 독송해보니 기도를 거듭할수록 들떠 있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적어도 기도하는 도중은 그러했다. 놀라웠던 것은 몇 년 동안 고생했던 불면증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었다. 일어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버릇이 여태껏 불면증을 키웠던 모양이다. 

집에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발원문도 적었다. 중구난방으로 이것저것 해 주십사 매달렸던 때와 달리 발원문을 적어보니 기도가 점차 정돈되었다. 발원문은 마음을 찍은 사진 같았다. 가장 가까운 도반인 가족을 미워했던 마음, 이웃들에게 생색내거나 질투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절로 참회가 되었다. 발원문을 읽으면서 나는 자신과 오롯이 마주 앉았다. 

5년 전, 남편이 위암 수술을 했던 때가 떠오른다. 수술실 앞에서 다섯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관세음보살님을 불렀다. 퇴원할 때까지 새벽마다 병원 법당에 엎드려 기도했다. 위암 환자는 퇴원 후에도 병원에서 일러 준 대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무턱대고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나고 만다. 그러니 그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 내게는 기도였고 그는 수행하듯 치료를 위한 방식의 생활을 견뎠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기도하는 날들은 절박했던 그때와도 닮아 있다. 면역력이 약한 남편이 걱정되어 챙기고 또 챙긴다.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한 동안 머뭇거렸던 신행 생활이 다시 제 길을 찾았다. 삶의 고비마다 놓치지 않고 했던 기도가 쌓여 신행생활도 조금씩 여물어 가나 보다.

남편도 ‘법화경‘’ 사경을 시작하며 부처님 법과 인연을 맺었다. 불교방송과 인터넷 방송의 좋은 법문을 공유하여 듣는다. 요즈음은 ‘금강경’을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내가 “금강경이 자장가가 되어 버렸네”하고 놀리면 그는 그저 웃는다.

맹렬했던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두어 달 동안 부처님 법과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에 맞닥뜨려도 부처님 법과 멀어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서원한다. 대학 공부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들이 대견하다. 남편이 이런저런 일로 힘들게 해도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한 생각을 바꾸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다 나쁜 것은 없나 보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동안 귀한 법문도 원 없이 듣고 불자로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으니 말이다.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절에 가서 마음껏 기도하고 싶다. 도반들과 함께 소리 맞추어 부처님 찬탄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가슴이 벅차다. 마음은 벌써 법당에 가 있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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