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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총림 방장 현봉 스님 경자년 하안거 결제법어

  • 교계
  • 입력 2020.06.08 11:28
  • 수정 2020.06.08 11:29
  • 호수 1541
  • 댓글 0

무루의 공덕 제대로 드러내려면 유루의 공덕도 원만히 닦아야

조계총림 방장 현봉 스님
조계총림 방장 현봉 스님

올해는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에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도 윤사월에 치르고 하안거 결제도 오늘 윤사월 보름에 하게 되었다.

윤달은 달을 기준으로 한 음력과 지구가 태양을 도는 태양력과의 오차 때문에 날짜상의 계절과 실제의 계절이 어긋나는데 이런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2~3년에 한 달을 더하여, 덤으로 있는 달이므로 공달<空月>이라고도 한다. 윤달은 귀신도 모르는 달이므로 “송장을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탈이 없다”고 할 정도로 무엇을 하던 동티가 나지 않고 탈이 없다는 속설이 있다.

그리고 “윤달에 세 번 절에 가면 업장과 액운이 소멸되고 복이 온다.”고 전해지고 있어 삼사순례를 하거나,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장을 소멸하는 공덕을 닦는 생전예수재를 지내기도 한다.

덤으로 있는 이 윤달에는 그동안 세상 사느라 바빠서 시간적 여유가 없어 힘쓰지 못했던 수행과 공덕을 닦도록 권장하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공달은 말 그대로 이 한 달이 없는 셈치고 우리의 마음을 비우면서 무루의 공덕을 닦고 복덕을 짓도록 하는 달이다.

공덕과 복덕에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는데, 유루는 새어 나가는 것이라서 한계가 있고, 무루는 새지 않는 것이다. 무루는 한계가 없는 것이면서 또한 무엇이나 끝없이 흘러나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강경 제8 依法出生分에는 무루공덕을 쌓는 가르침이 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복이 저 앞의 복(저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다.”고 하였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 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福德多 須菩提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면 그 복덕은 많고 적은 상(相)이 있기 때문에 많다고 한 것이다. 그 복을 얻음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다는 것은 능소(能所)와 많고 적음이 있는 분별의 상대적인 유루복이어서 많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허공처럼 상(相)이 없는 복덕의 성품(福德性)은 상대가 사라져 능소가 없으며 시비가 끊어지고 득실(得失)도 없으니 무소득(無所得)의 무루(無漏)인 것이니, 이 무루의 복덕은 다소(多少)를 초월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무량무변인 것이다.

그러므로 찬탄하며 말하되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福德)이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고 했다.

若人靜坐一須臾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만 고요히 앉아있어도

勝造恒沙七寶塔 갠지스강 모래수 칠보탑을 쌓은 것보다 수승하다.

寶塔畢竟化爲塵 칠보탑은 필경에 먼지로 변하지만,

一念淨心成正覺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

이 게송은 보조스님께서 즐겨 쓰시던 무루복을 지어가는 관문 같은 문수보살 게송이다. 오늘 우리 대중들이 하안거 결제를 하는 것은 이런 무루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황제와 군주들은 통치의 모델을 불교의 전륜성왕과 아쇼카대왕에게서 모델을 찾았는데, 신라 법흥왕, 백제 성왕 등도 그런 인물이다.

중국 양나라를 세운 무제는 서기 502년 4월 8일 제위에 올랐으며, ​2년 후 초파일에 자신은 불법을 받들고 불법으로 세상을 교화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연호는 시방삼세에 두루 미친다는 뜻을 지닌 보통(普通)으로 하였으며, 스스로 곤룡포 위에 가사를 입고 [방광반야경]을 강설하면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황금으로 변하는 감응을 얻었으며, 천하의 곳곳에 절을 짓고 탑을 쌓았으며. 수많은 스님을 배출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니 사람들이 '불심천자' 라 불렀다.

다음은 ​무제가 불법에 귀의하는 간절한 발원문이다.

“양나라 황제 소연<이름>은 머리 숙여 시방삼세의 거룩한 부처님과 법보님과 스님들께 예배드립니다. ​엎드려 부처님 경전을 살펴보니 보리심을 내는 것이 곧 불심이라 하였는데, 다른 선법으로는 견줄 바 없습니다. 여래께서는 중생들을 삼계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이끌고자 지혜의 횃불을 환히 밝히셨습니다. 제가 예전에는 삿된 법에 물들어 살았지만 이제는 미혹을 버리고 돌아갈 바를 알게 되었으니 정법에 귀의하겠나이다. ​제가 미래세에 다시 태어나면 어려서 출가하여 불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제도하여 다함께 성불하기를 발원합니다. 원컨대 불보살님께서는 큰 자비로 이를 증명해 주시옵소서.”

양무제는 궁궐 안에 내불당을 만들고 고승대덕들을 수시로 초청하여 신료들과 함께 설법을 들었다.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46년간 아무리 바빠도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빠뜨리지 않을 정도였다.

​무제는 몸소 검소와 절약을 실천하며 평소에는 삼베옷을 입고 부들방석에 앉았으며, 짚신을 신고 갈건을 쓰고 재계를 하면서 오직 허물없는 이라야 남을 지도할 수 있으며, 스스로 깨끗한 이라야 남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육식을 금하는 중국불교의 채식전통은 양무제부터 비롯되었다.

불교교단이 부패하고 승려가 존경받지 못하면 민중들이 불법을 존중하지 않을 것을 고민하며, 서기 511년 5월 양무제는 고승대덕들에게 모두 서한을 보내 "출가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래의 옷을 입고도 여래의 행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가짜스님으로 마치 도적과 다름이 없으므로,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승려는 단호히 환속시켜 다시 호적에 편입시켜 강력히 처벌할 것임"도 밝혔다.

무제는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그중에서도 527년에는 6년 불사 끝에 완공된 남경의 동태사는 천하제일 황실사찰이었다. 양무제는 그해 3월에 동태사(同泰寺)에서 사신(捨身)공양을 시작하여 네 번이나 사신공양을 하였다. 사신이란 ‘법화경’ ‘열반경’ 등에 설해진 가르침으로 몸을 버려 부처님께 공양하거나 중생에게 보살행을 베푸는 행위를 말한다.

양무제가 사신하여 사찰에서 행자복을 입고 노비처럼 봉사하고 있으면 대신들이 절에다 막대한 재물을 보시하여 노비 값을 지불하고 다시 궁궐로 모셔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양무제가 달마스님을 처음 만나서 물었다.

​“짐이 전국에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으며 스님들을 출가 시키고 수많은 불사를 하였는데 얼마나 많은 공덕이 있습니까?”

“所無功德 공덕이 없습니다.​”

​“如何是聖諦第一義 어떤 것이 성스러운 으뜸가는 진리입니까?”

​“廓然無聖 확연하여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對朕者誰 그러면 짐의 앞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不識 ​모릅니다.”

자기의 불심을 자랑하며 칭찬 받기를 바라던 양무제와 문답을 나눈 달마대사는 갈대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 소림굴에 들어가 말없이 면벽하였다고 전해온다.

양무제가 죽은 뒤 300년 후에 만들어진 이 설화에 대해 양무제가 유루공덕이나 지으면서 상에 집착하였기에 달마대사가 깨우치려고 했지만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떠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양무제나 달마대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한 속 좁은 소견이다.

이 설화를 다시 들여다보면 금강경을 늘 수지 독송하면서 심지어 황제라는 상(相)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예경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계행을 지키며 많은 공덕을 지은 양무제에 대해 달마대사는 무주상으로 상에 집착하지 않고 능소(能所)를 떠난 소무공덕(所無功德)이라고 절대적인 최고의 찬사를 한 것이다.

양무제는 그의 연호(年號)를 보통이라고 쓸 정도였으니 달마대사의 ‘확연하여 성스러울 것도 없다 廓然無聖’고 한 것과 같고, 달마가 ‘관음보살 후신이라.’는 상을 보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不識>’고 하면서 그를 성인이라 말하여도 붙잡지 않았던 것이다.

달마대사는 성스러운 진리의 제일가는 뜻<聖諦第一義>인 복덕성의 입장에서 유루와 무루를 나누지 않고, 유루의 공덕을 통해 능소가 없는 무루(無漏)의 소무공덕(所無功德)으로 승화시켜 찬탄한 것이다. 유무(有無)를 초월한 중도(中道)에 무슨 우열을 말했겠는가?

뒷날 육조 혜능스님에게 “​달마대사께서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하니, “성품을 보는 것이 공(功)이요, 평등이 덕(德)이다. 생각생각에 막힘이 없이 항상 본성의 진실한 묘용을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한다.”고 하였다.

양무제는 불교경전을 번역하고 스스로 주석을 달기도 하였으며, 유교나 도교의 경전에도 박통하였는데, 우리들이 읽는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눈 이는 바로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이다.

그러니 양무제는 이 금강경 사구게 등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설했겠습니까?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울만한 칠보로 보시한 그런 공덕에 비길 것이 아니다.

달마는 실제인 근본진리의 입장에서 떡 이야기를 하였으나, 양무제는 사람들에게 떡 이야기는 물론 실제로 많은 떡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삼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공덕으로 수승한 과보를 받는 것도 찬탄할 일인데, 거기에다 이 복덕성(福德性)이 본래 공(空)한 줄을 깨달으면 그 보시한 공덕 위에 본래모습<本地風光>을 더 확연히 드러냈을 것이다.

인과의 연기법을 알고 지은 유루의 복이 지극해지면 마음이 신령스러워지는 것이니<福至心靈> 능소를 초월한 무루의 소무공덕(所無功德)이 될 것이다.

부질없는 상(相)의 묘용이 원만해져야 본래 아무것도 없는 성(性)이 온전해지는 것이니, 무루의 공덕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상이 있는 유루의 공덕도 원만히 닦아야 할 것이다.

無雲露靑山 구름이 사라지면 드러나는 청산이여

舒卷不相干 펼치거나 걷히거나 아무 상관없지만

江心現蟾影 강물 속에 나타나는 달그림자는

月亮方可看 하늘의 달빛이 밝아야만 볼 수 있네.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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