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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法師)

재가불교 큰 별이 지다

대학시절 수업 중에 ‘포교론’ 강의가 있었다. 강사는 선진규 법사였다. 한 학기 강의였는데 수업이 끝날 때까지 모두들 교수가 아닌 법사님으로 불렀다. 그는 개인적으로 동국대 불교학과 선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선배님으로 부르지 못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호칭은 언제나 법사님이었다. 평생을 법사님으로 불린 그는 6월8일 86세의 나이로 세연을 접었다. 중생구제와 대중포교의 원대한 꿈을 펼쳤던 김해 봉화산 정토원에서 조용히 아미타불 회상으로 향했다.

법사(法師)는 그의 인생을 응축한 언어 사리다. 6·25한국전쟁과 끝내 넘지 못해 죽음으로 대신해야 했던 보릿고개, 민중들의 극심한 고통의 한복판에서 중생을 넉넉히 품어야 할 불교는 분규로 얼룩졌다. 그 지독한 혼돈의 현장에서 그는 중생구제와 불교포교라는 보살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했다. 그런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 김해 봉화산 꼭대기에 우뚝 선 호미 든 관음성상이다. 1959년 동국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뜻을 같이하는 불교학과 청년 불자 31명과 함께 호미 든 관음성상을 모셨는데 한 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병을, 한손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굶주리는 민중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호미를 들었다. 그러나 관음보살의 자비에만 기댄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정병이 되고 호미가 되겠다는 서원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김해 봉화로 낙향해 정토원을 설립, 불교포교와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또 대한불교청년회 회장을 맡으며 만해백일장을 기획하고 만해선양 사업에도 나섰다. 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해 한문서당과 예절서당을 운영하며 미래 기둥들이 마음 밭을 가꾸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는 자필로 “자신에게 미안한 짓 하지 말라. 한없이 능력껏 베풀되 돌아보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아마도 평생토록 지켜왔던 삶의 벼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 잃은 그 유훈은 그의 삶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로 남았다.

김형규 대표 kimh@beopbo.com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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