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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㊽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② - (1) ‘중고’시기 왕위계승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위상 - 상 

진평왕‧선덕여왕 계통은 성골, 용수‧춘추 계통은 진골 설정 타당성 없어

중고 시기 강력한 왕권과 정치안정 이뤘던 왕은 진흥왕과 진평왕
두 왕 특징은 중심세력 강한 결합과 정략적 근친혼으로 조건 비슷
‘중대’ 왕통 연 무열왕도 다르지 않아…진골로 구분은 설득력 없어

사적 제180호 진평왕릉.문화재청 제공
사적 제180호 진평왕릉. 문화재청 제공

신라 ‘중고(中古)’ 시기는 23대 법흥왕대부터 28대 진덕여왕대까지 5세대 6인의 국왕이 재위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 ‘중고’ 시기를 새로 연 인물은 법흥왕의 아버지인 22대 지증왕이었다. 

지증왕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 “성은 김씨,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 또는 지철로(智哲老)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왕력조와 지철로왕조에는 지증왕의 이름을 지철로・지도로・지대로,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至都盧)로 표기되는 등 약간의 글자 차이를 보여줄 뿐이고, 동일인물이다. 지증왕의 계보를 보면, ‘삼국사기’에는 “나물왕의 증손이며, 습보(習寶) 갈문왕의 아들이요 조(소)지왕의 재종제(6촌아우)이다. 어머니는 김씨, 오생부인(烏生夫人)이니 눌지왕의 딸이다. 비는 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니 등흔(等欣) 이찬의 딸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지증왕의 아버지인 습보갈문왕은 나물왕의 손자이고, 눌지마립간의 조카이자 사위가 되는 관계였고, 지증왕은 나물왕의 증손자이고, 눌지마립간의 외손자가 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지증왕의 아버지가 눌지마립간의 동생인 기보(期寶)갈문왕이라고 하여 한 세대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어머니가 눌지마립간의 딸인 오생부인이라고 한 것은 일치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지증왕은 나물왕의 손자가 되어 ‘삼국사기’에 증손자라 한 설과 어긋난다.) 사실상 ‘중고’ 시기를 연 지증왕의 계보를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뒷날 ‘중대’ 시기를 새로 연 태종무열왕의 계보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물마립간의 증손자인 지증왕과 진흥왕의 증손자인 태종무열왕의 사이에 2인의 계보와 즉위과정이 극히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사실은 성골에서 진골로의 왕통의 교체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지증왕의 즉위과정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서기 500년에 즉위하였고, 즉위 당시의 나이가 64세였다고 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500년 즉위설과 501년 즉위설 등 양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계미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즉위 뒤 3년, 혹은 4년 동안 갈문왕(葛文王)의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실은 즉위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몸이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전왕(소지마립간)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위를 잇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64세였다고 하였다. 

또한 소지마립간 시기에 나타난 여러 차례의 불미스러운 사건들까지 종합하여 볼 때, 지증왕은 소지마립간 말년(500)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고, 즉위 뒤 4년에 걸쳐 갈문왕의 칭호를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냉수리비’에 의하면 아직 정세가 안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6부회의에 참여하는 대표들이 각자 왕(王)을 칭하는 6부 공동의 지배체제의 운영 방식이 여전히 이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냉수리비’가 세워진 한 달 뒤인 503년 10월에 국호를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국왕 이외에는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지배체제가 지증왕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증왕은 6촌 재종 관계인 21대 소지마립간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재위 15년 동안에 왕권을 강화하고 주군제(州郡制) 시행을 비롯하여 일련의 지배체제 정비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그 아들인 법흥왕으로 하여금 ‘중고’ 시기를 열게 하였다. 지증왕에게는 법흥왕과 입종(立宗)갈문왕 등 두 아들이 있었다. 법흥왕 11년(524)에 수립된 ‘울진 봉평비’에 의하면 법흥왕은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募秦麻立干), 입종갈문왕은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법흥왕은 탁부(啄部) 소속, 입종갈문왕은 사탁부(沙啄部) 소속이었음이 주목된다. 

원래 6부체제에서 17대 나물마립간 이후 6부회의체의 대표인 마립간은 탁부 소속에서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지증왕이 사탁부 소속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6부체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6부 가운데 탁부와 함께 사탁부의 세력이 크게 강화되는 반면 여타 4부의 세력은 약화됨으로써 사실상 탁부와 사탁부 2부 연합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지증왕의 장자인 법흥왕은 왕위(마립간)를 이으면서 원래 왕위를 계승해 왔던 탁부 소속이 되고, 둘째 아들인 입종은 지증왕을 이어 갈문왕 칭호와 사탁부 소속이 되어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앞에 언급한 ‘울진 봉평비’에 의하면 법흥왕 11년(524) 당시 6부대표 14인의 회의는 제일 앞에 기록된 법흥왕과 입종갈문왕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3대 법흥왕은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상대등의 설치 등 일련의 정치개혁을 통하여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자신은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으로 칭하여 6부체제의 탁부 대표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지배자의 위치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재위 27년만에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왕위는 조카인 진흥왕으로 계승되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갈문왕,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었기 때문에 3촌숙질 사이의 결혼이었음을 알 수 있다. 

24대 진흥왕은 7세(‘삼국유사’에서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지소부인이 태후로서 섭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국정을 보좌한 인물은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였는데, 이사부는 나물왕의 4세손, 거칠부도 나물왕의 5세손으로서 모두 탁부 소속이었음을 보아 ‘중고’ 시기 나물왕 직계의 동족 의식과 탁부 출신이 주류세력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은 이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영역확장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흥왕은 왕위의 안정적 계승을 위하여 일찍이 진흥왕 27년(566) 장자인 동륜(銅輪)을 왕태자로 책봉하였으나, 6년만인 33년(572)에 사망함으로써 진흥왕 사망 이후 왕위 계승이 한동안  혼란을 겪게 되었다.

진흥왕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는 차자인 사륜(舍輪, 또는 金輪)이 왕위를 이어 진지왕이 되었다. 25대 진지왕은 즉위하자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보좌케 하였는데, 거칠부가 곧 죽음으로써 왕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진지왕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 나라 사람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한 것을 보아 왕위계승 경쟁자들에 의해 쫓겨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아들로 용수(龍樹, 또는 龍春)가 있었으나, 왕위는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이 계승하여 진평왕이 되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진지왕의 왕비인 지도부인(知道夫人)의 아버지가 기오공(起烏公)이고, 그에게는 갈문왕 칭호가 주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가 외조부(기오공)의 신분 하자로 인하여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로 강등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용수-춘추 부자의 진골 신분설에 얽매인 추측에 불과한 주장이라고 본다. 나는 진지왕의 실정이나, 용수 모계의 신분의 문제보다는 진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륜태자 계통의 동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6대 진평왕 백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과 결혼하였는데, 만호부인은 진흥왕과 남매의 관계이며 동륜과는 3촌 숙질의 관계이기도 하였다. 진흥왕 이후 ‘중고’ 시기의 왕통은 입종갈문왕의 직계 자손으로 이어졌음을 고려하면 동륜태자가 입종갈문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그 소생인 백정이 그 4촌 형제인 용수와의 왕위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고 본다. 

동륜태자와 만호부인 사이에서는 진평왕(백정)과 진정갈문왕(伯飯)・진안갈문왕(國飯)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이들 3인에게는 모두 아들이 없고, 진평왕에게는 27대 선덕여왕(德曼)과 천명부인(天明夫人) 등 두 딸만이 있었다(백제의 薯童說話에서는 善花公主가 진평왕의 딸로서 등장하지만, 이는 설화적인 인물일 뿐이었다). 둘째 딸인 천명부인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와 5촌 숙질의 관계였는데, 둘은 결혼하여 김춘추를 출생함으로써 뒷날 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케 하였다. 그리고 진안갈문왕에게는 28대 진덕여왕(勝曼)이 있어서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고’ 시기의 5세대 6인의 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또한 가장 강력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던 왕은 24대 진흥왕(540〜576)과 26대 진평왕(579〜632) 등 2인이었다. 진흥왕은 군사조직의 정비와 영역 확장을 이룩한 업적, 그리고 진평왕은 안정된 왕권과 행정관서의 정비를 이룩한 업적으로 뒷날의 삼국통일 전쟁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그런데 ‘중고’ 시기를 대표하는 제왕으로 평가되는 진흥왕과 진평왕에게는 공통적인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흥왕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그 부모가 사탁부 소속의 입종갈문왕과 탁부 소속의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으로서 6부체제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탁부와 사탁부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그 위에 나물왕의 직계 자손으로서 같은 탁부 소속이었던 이사부와 거칠부 같은 명신의 보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평왕도 그 부모가 진흥왕의 아들인 동륜태자와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으로서 역시 왕실의 완전한 화합을 가능케 하였다. 왕실 안에서의 이러한 극심한 근친혼은 권력을 다른 가문이나 친족에게 나누지 않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써 정략결혼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을 연장하면 사실상 ‘중고’의 왕통을 새로 연 지증왕, 그리고 ‘중대’의 왕통을 새로 연 태종무열왕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증왕의 부모는 나물왕의 손자인 습보갈문왕과 눌지마립간의 딸인 오생부인으로서 이들은 4촌 남매의 관계였다. 또한 태종무열왕의 부모는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와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으로서 5촌 당숙질의 관계였다. 이들의 결혼도 왕실 안에서의 정략결혼의 성격을 띤 근친혼의 형태였다. 이로써 용수-춘추 계통을 진평왕-선덕여왕 계통의 성골과 구분되는 별개의 진골 신분으로 설정하려는 이해는 타당성을 갖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학계 일각에서는 지증왕・법흥왕・진흥왕・진안갈문왕의 부인의 성이 박씨(朴氏)로 표기되어 있는 점을 들어서 김씨 왕과 박씨 왕비의 결혼을 성골의 성립조건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한때 행해진 바 있었으나, 박씨의 칭성 자체가 7세기 후반에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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