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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21칙 조주끽다(趙州喫茶)

조주가 말하길 “차나 마시게”

모두에게 똑같이 차 권한 조주
꾸밈없는 인간 모습 그대로 보여
같은 차 입에 머금고 있음에도
도리 알지 못하는 건 자신 책임

조주가 승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승이 말했다. “없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또 다른 승에게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승이 말했다. “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삶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다. 차를 마시는 것 그 자체야말로 조사선의 가풍에 가장 철저한 행위이고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은 신참이건 구참이건 누구를 막론하고 차를 권하였다. 그러나 차를 입에 머금고 있으면서도 그와 같은 도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토록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는데도 그 곁에서 시봉하고 있던 시자마저도 아직은 그와 같은 도리를 모르고 있었던가보다. 때문에 왜 신참자와 구참자에게 똑같이 차를 권하는지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조주는 그와 같은 시자에게도 여전히 차를 권하였다. 그런데 시자는 그 차를 마시기 전에 다시 의문을 가졌다. 왜 자기한테도 똑같이 차를 권하는 것인지를.

조주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선사로서 대단히 능수능란한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소위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 불렸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로서 지방세력의 득세로 말미암아 국가가 사분오열되어 있던 시대였다. 조주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하북성 조주의 관음현은 사통팔달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때문에 진득하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제자가 없었다. 그 점이 곧 조주가 모든 부류의 선자를 교화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고, 또한 어떤 선풍에도 얽매이지 않는 조주의 독특한 선풍을 진작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조주가 스승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에게 물었다. ‘도(道)란 무엇입니까.’ 남전이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이다.’ 평상심이란 본래청정한 마음으로 애초부터 구비하고 있는 인간의 본래모습을 가리킨다. ‘그러면 그와 같은 도를 가까이 해볼 수 있겠습니까.’ ‘가까이 하려고 하면 곧 어그러지고 만다.’ ‘그러면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도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도는 그것을 알고 모르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안다면 망각(妄覺)이 될 것이고 모른다면 무기(無記)가 될 것이다. 만약 의심이 없이 도에 통달하면 마치 만고불변의 허공처럼 탁 트여 걸림이 없다. 그러니 어찌 억지로 옳다 그르다 하겠는가.’ 이에 조주가 그 자리에서 깨쳤다.

일찍이 승이 운거도응(835~902)에게 물었다. ‘영양이 나뭇가지에 뿔을 걸어두고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거가 말했다. ‘육육은 삼십 육이다.’ ‘뿔을 내렸을 때는 어떻습니까.’ ‘육육은 삼십 육이다.’ 이에 승이 예배하자, 운거가 물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도는 종적(蹤迹)이 없다는 줄을 알고 있는가.’ 승이 답변하지 못했다. 얼마 후에 그 승이 운거와 했던 문답을 조주에게 전하자, 조주가 말했다. ‘운거사형은 역시 사형답구나.’ 승이 갑자기 조주에게 물었다. ‘영양이 나뭇가지에 뿔을 걸어두고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구구는 팔십 일이다.’ ‘뿔을 내렸을 때는 어떻습니까.’ ‘구구는 팔십 일이다.’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뭐가 어렵다는 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십시오.’ ‘참으로 답답하구나. 그대는 갈수록 태산이구나.’

여기에서 운거가 말한 36이나 조주가 말한 81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의 삶 그대로를 상징한다. 깨침이라든가 진리는 일상의 생활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승은 그 도리를 어떤 형이상학이나 관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때문에 조주는 그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갈수록 태산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것은 마치 눈을 뜨기 전에는 팔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말하려고 하니 삼천 리나 더 멀리 도망쳐버리는 꼴이다. 어떤 것을 분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본래자리로부터 더욱더 멀어져버리고 만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41호 / 2020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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