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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계체와 계법

기자명 정원 스님

계 받는 순간 주인노릇 해왔던 번뇌에 역행 시작

계 받아도 번뇌 끌리는 건 비슷
수계 후 악행 그치는 계체 생성
자기 경책·항거 역량 점점 증장
삼귀의·오계 받는 게 불자 시작

“저는 계는 잘 지키지 못하면서 좀 크게 변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이것은 약간 뒤바뀐 생각이 아닐까요? 계를 잘 지키면서 공부하다보면 저절로 때가 오련만 결과에 대한 욕심이 앞서는 중생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질문 속에 답까지 다 들어 있지만 조금만 보태보자. 불교에 입문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삼귀의 오계를 받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한다고 스스로 말해도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저 불학(佛學), 즉 불교를 학문으로 공부할 뿐이지 부처님을 닮으려고 그분의 행을 따라 배우는 학불(學佛) 불자라고 할 수는 없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탐진치 등의 번뇌로 악업을 짓고 그에 따라 과보를 받아 혹(惑)·업(業)·고(苦)의 악순환 속에서 육도윤회하고 고통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통을 벗어나 생사를 요달하고 필경에는 불도를 성취하게 할 목적으로 계를 제정하셨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에 의거하여 범부에서 성불로 가는 단계를 정리해보면, 범부(생사윤회)→불교입문→경계(敬戒)→수계(受戒)→학계(學戒)→지계(持戒)→홍계(弘戒)→원계(圓戒)→성불이라고 할 수 있다.

계를 받을 때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원력을 가지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힘을 기르고 선량한 습성을 익혀 십법계의 유정무정 및 모든 중생과 사물을 대상으로 자비심을 실천하겠다는 큰 서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계식 때는, “시방법계 일체 유정무정에 대해 일체 악을 끊고, 일체 선을 행하겠습니다. 일체 중생이 불도를 이루도록 제도하겠습니다”라는 대승보살의 보리심을 발해야 한다. 악업을 끊고(斷惡), 선업을 닦아(修善), 중생을 제도(廣度衆生)하겠다는 원력을 가지고 계를 받으면, 방비지악(防非止惡)의 공능을 가지는 계체(戒體)를 얻게 된다. 이 계체는 시방법계의 모든 선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수계 이후의 모든 행위는 일체중생을 대상으로 평등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계체는 실질적으로 어떻게 작용할까?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을까? 사실상 계를 받고나서도 우리의 일상은 계를 받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번뇌와 망상에 이끌려 다닌다. 그러나 계체를 얻은 이는 이전처럼 탐진치를 일으키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음성이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첫째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스스로에게 경계하는 단계로써 ‘계를 받은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는 예방의 목소리다, 두 번째는 습관에 따라 결국 번뇌를 일으키더라도 그 후에 일어나는 참회의 목소리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사전방어의 역량과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해’라는 사후반성의 공능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무시이래로 주인 노릇을 해왔던 번뇌에 역행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지켜야 할 계의 내용을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자기 경책과 항거의 역량은 점점 증장한다. 이것이 계체가 주는 공능인데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작용한다.

계를 받기 전에는 법계를 가득 채운 모든 경계가 혹·업·고의 대상이었지만, 수계를 함과 동시에 모든 소연경은 선업을 짓는 대상으로 변화한다. 길고양이에게 음식을 주고 보살펴 주는 선행을 한다고 해서 채식주의자로 살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은 자신의 마음상태나 대상 혹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을 사랑하는 것과 육식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수계를 통해 계체를 얻은 이는 생명 있는 일체중생이 모두 보살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에 무엇을 먹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이 일반적인 선행과 계법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정원 스님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학원 shamar@hanmail.net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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