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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무쟁삼매(無諍三昧)

기자명 현진 스님

공의 이치에 머물러 다툼이 없는 삼매

대중 모이는 단체서 중요한 건 화합
아라한 가장 큰 덕목으로 논쟁 없이
대중 잘 이끄는 것을 으뜸으로 여겨

제9 일상무상분 말미에서 수보리는, 아라한이 되었어도 아라한이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은 상(相)에 집착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아라한도 자신은 아라한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그리고는 그 실례로서, 여래께서 수보리 자신을 무쟁삼매를 성취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 말씀하셨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기에 여래의 말씀이 참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로 옮겨놓고 보니 수보리 자신이 자신의 일을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相)을 가진 것이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이 아닌 ‘상황'이 말의 주어가 된 인도의 수동태 문장이라면 이미 객관성이 보장되므로 별 무리가 없는 듯하다.

만약 자신이 아라한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가졌더라면 여래께서 무쟁삼매를 성취한 자들 가운데 첫머리라고 여래께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란 수보리의 말에서 우리는 무쟁삼매의 성취가 아라한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쟁삼매'란 무엇을 말하는가?

‘무쟁삼매’란 공(空)의 이치에 머물기에 다른 것과 다툼[諍]이 없는[無] 삼매(三昧)를 일컫는데, ‘대지도론’에서 무쟁삼매의 특징은 항상 중생을 관찰하되 마음이 번뇌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여러 가지로 연민하는 마음을 내어 그것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라 하였다. ‘무쟁’에서 말하는 다툼 또한 말로 하는 언쟁(言爭)을 가리키는데, 쟁심(諍心)이라하면 상대방의 잘못된 허물을 찾아내어 말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을 말하므로, 사유에 필요한 건전한 논의마저 없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논쟁이 없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구마라집 스님의 ‘유마경’ 주석에 “무쟁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삼매의 힘으로 중생을 보호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법성에 그대로 따름으로써 어김도 없고 다툼도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무쟁삼매인(人)'이라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한 단어의 범어는 ‘araṇāvihārin'인데 ‘a­[無]raṇa[諍]vihāra[住]­in[人]'으로 머문다는 의미의 ‘vihāra'가 삼매로 의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현장 스님은 ‘無[a­]諍[raṇa]住[vihārin]'로 직역하였다. 그런데 이어진 문장에서 ‘araṇāvihārin'이 한 차례 더 언급되자 현장 스님은 앞과 같이 무쟁주(無諍住)로 옮긴 반면 구마라집 스님은 소리번역과 뜻 번역을 혼합하여 아란나행(阿蘭那行)이라 번역하였다. 아란나(阿蘭那)는 아란야(阿蘭若)(araṇya, 출가자의 수행처)와 발음이 비슷해 혼동하기 쉬우나 다른 글자로서 ‘araṇa'의 음역이며, 行은 ‘vihārin'의 의역이다. 이는 구마라집 스님이 이 단어를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구마라집 스님이 연이은 문장에서 삼매와 행으로 옮긴 ‘vihāra'는 이미 ‘금강경’ 첫 부분에 등장하니, 제1 법회인유분의 ‘부처님께서 서라벌에 대중들과 머무셨다[viharati].’라는 부분이다. 두 단어 모두 ‘vi√hṛ(살다, 머물다)'에 온 말이다. 이 단어는 어원을 분석해볼 경우 일반적인 의미 외에 동사 ‘√hṛ'가 ‘가져가다, 데려가다, 이끌다’ 등의 의미가 있으므로 ‘잘[vi­] 이끌다[√hṛ]'로 보면 부처님께서 서라벌에 계실 때 함께 계셨다는 말에는 따르는 대중들을 스승으로서 잘 이끌고 계셨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많은 대중이 모이는 집단은 그 단체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요건 가운데 하나가 화합(和合)이다. 인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인종에 사회적 계급제도의 높은 벽을 지닌 나라인데, 특히 2500여년 전인 부처님 당시에 지금보다 훨씬 공고했던 계급의 벽을 갑자기 허물고 브라만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수행집단에 최하층민까지 제한 없이 받아들인 상황이었기에 당시 승가에 필요했던 대중화합은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분명 넘어서있다. 그래서 부처님도 대중들을 잘 섭수하여 이끌고 계심이 필요했을 것이요, 이미 승단의 중추가 된 아라한의 가장 큰 덕목으로 번뇌나 일이키는 논쟁[諍]을 삼간[無]채 대중들을 잘 이끌며 지낼[住, vihāra]수 있는 능력을 으뜸으로 본 것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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