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㊾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③ (1) ‘중고’시기 왕위계승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위상 - 중
79.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㊾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③ (1) ‘중고’시기 왕위계승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위상 - 중
  • 최병헌 교수
  • 승인 2020.06.29 15:46
  • 호수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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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정치이념이나 종교사상 문제로 새롭게 접근 필요

역사학계, 전통적으로 동륜계통은 성골·사륜계통은 진골로 구분
성골서 진골로 왕위 교체를 신분 강등 해석하는 건 추측성 주장
왕실 안 전형적 근친혼 취해 신분상 서로 어떤 차이도 발견 안돼  
사적182호 경주 선덕여왕릉.
사적182호 경주 선덕여왕릉.

24대 진흥왕(540~576)이 세상을 떠난 뒤 ‘중고(中古)’ 왕통은 큰 아들 동륜 계통과 둘째 아들 사륜 계통으로 나뉘었다. 동륜 계통은 동륜(태자)-백정(진평왕)-덕만(선덕여왕)・승만(진덕여왕)으로 계승되었고, 사륜 계통은 사륜(진지왕)-용수(문흥갈문왕)-춘추(태종무열왕)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왕통의 분열은 단순한 왕실 계보의 분화로 그치는 문제는 아니었다. 역사학계에서는 동륜 계통의 ‘중고’ 왕실은 성골, 사륜 계통의 ‘중대’ 왕실은 진골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승만(진덕여왕)에서 춘추(태종무열왕)에로의 왕위교체를 성골에서 진골로의 신분 강등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신라사 시기구분의 주요한 근거로 삼아왔다. 그리하여 성골과 진골의 구분을 왕통의 신분상 차이점으로 전제하고 동륜 계통과 사륜 계통의 신분상 변화이유를 밝히려는 노력을 다각도로 경주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추측성의 주장만 남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사회적 신분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일찍부터 의문을 제기하여 왔다. 이 문제는 실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으로 결론을 말하면 사회적 신분이나 법제적 신분 문제라는 인식을 벗어나서 정치이념이나 종교사상의 문제로 새롭게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하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진흥왕은 왕권강화와 영역확장에 성공하여 훗날의 삼국통일 기반을 구축한 제왕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위하여 일찍이 큰 아들인 동륜을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다음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에 앞서 태자가 사망함으로써 진흥왕의 기대는 어긋나게 되었다. 진흥왕의 뒤는 둘째 아들인 사륜이 계승하여 25대 진지왕(576~579)이 되었으나, 4년 만에 귀족회의에 의해 폐위당하는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진지왕 다음은 아들인 용수(용춘)가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이 계승하여 26대 진평왕(579~632)이 되었다. 아들 대신 3촌 족하인 백정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은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 그의 어머니가 되는 근친혼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진평왕은 즉위하자, 곧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책봉하고. 또한 전왕의 아들인 용수를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으로 책봉함으로써 왕실의 화합과 안정을 도모하였다. 용수를 갈문왕으로 책봉한 사실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만 전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일체 전하지 않는 대신 뒷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존했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왕의 형제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갈문왕 칭호가 김춘추가 즉위하는 중대에 들어와서는 폐지되고, 대신 ‘대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진평왕에게 받았던 갈문왕을 대왕으로 바꾸어 추존하였기 때문에 갈문왕 책봉 사실은 기록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본다. 이곳에서 용수가 갈문왕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와 진평왕의 형제들의 신분을 진골과 성골로 차등 구분하는 이해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임을 지적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런데 용수가 갈문왕이었다는 사실보다 더욱 용수의 사회적 신분과 정치적 위상을 잘 나타내주는 것은 용수가 진평왕의 둘째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결혼하여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임명되어 궁궐과 왕실의 업무를 관장하였다는 점이다. 용수는 5촌 당숙질 관계인 천명부인과 결혼함으로써 진평왕의 사위이자, 선덕여왕의 제부가 되었다. 그 결과 용수와 천명부인 사이의 소생인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가 되었다. ‘중고’ 왕실 안에서의 전형적인 근친혼의 형태를 취한 결과였으며, 이들 사이에서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한편 진평왕은 즉위 44년(622) 2월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임명하여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私梁宮)을 통합하여 관장케 하였다. 그 앞서 진평왕 7년(895) 대궁・양궁・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 사람을 두어 세 궁궐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한 것이다. 원래 지증왕 때부터 6부체제라는 과두체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탁부(양부)와 사탁부(사량부)의 세력이 특히 강화되어 2부연합의 운영체제가 되었었는데, 진평왕 때에 다시 6부체제에서 초월적인 존재로 상승한 국왕의 궁궐을 중심으로 하고, 양부와 사량부의 본거인 두 궁궐을 합쳐서 통합 관리하는 기구로서 내성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국왕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 강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그 내성의 장관인 사신(私臣)으로 용수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가 왕권 강화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선덕여왕 때에 여왕의 권위 실추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게 되었는데, 그 공사를 감독 주관한 인물이 바로 내성사신의 직책을 맡고 있던 용수였음이 주목된다. 이로써 용수는 진평왕과 선덕여왕이 재위하는 동안 왕권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폐위당한 진지왕을 이어 즉위한 진평왕은 먼저 상대등으로 노리부(弩里夫)와 수을부(首乙夫) 등을 연이어 상대등으로 삼아 귀족세력과의 화합을 모색하는 한편, 즉위 초기부터 위화부(位和府)・선부(船府)・조부(調府)・승부(乘府)・예부(禮部)・영객부(領客府) 등의 중앙의 행정관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진평왕의 친형제 2인과 사촌형제인 용수를 갈문왕으로 책봉하여 왕실의 결합을 추구하였고, 마침내 내성사신을 설치하고 용수를 그 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왕실세력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특히 뒷날의 궁내부에 해당되는 내성은 그 산하에 수많은 왕실 측근의 궁정기구들을 설치하여 관리함으로써 사실상 강력한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기구가 되었으며,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가 즉위한 중대에 들어가 더욱 강화되어 갔으며, 때로 내성사신이 군사권을 장악한 병부령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54년간의 장기집권을 통하여 왕권 안정과 지배체제 정비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두지 못한 점이었다. 그에게는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과 용수의 부인이 되는 천명부인이라는 두 딸만이 있었다.  이러한 불안은 마침내 진평왕 말년에 반란의 모의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진평왕이 사망하기 8개월 앞선 진평왕 53년(631)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의 반란 모의가 발각되어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자의 관등이 최고위인 이찬(伊湌)이었다는 점(이찬 위의 최고위 관계로 이벌찬이 있었지만, 이벌찬은 이찬에서 분화된 것으로 봄), 그리고 구족이 처벌 받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반란모의 사건은 개인 차원에서의 정치싸움의 문제가 아니고, 나물왕을 공동시조로 하는 김씨왕족 가운데서 진평왕과 용수 세력에 도전하는 여타 다른 가문(小Lineage, 系譜親族)의 왕위계승 싸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맏딸인 덕만이 뒤를 이었는데, 최초 여왕으로서의 선덕여왕(632~647) 즉위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조에서는,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國人)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성스러운 임금 큰 할머니)의 칭호를 올렸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즉위 당시 선덕여왕의 나이는 50세를 넘긴 노년이었고, 결혼하여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는 배필이 있었다. 일본의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는 음(飮)자를 반(飯)자의 간오(刊誤)로 보아 진평왕의 친동생인 백반(伯飯, 眞正葛文王)으로 비정하였는데, 이런 추정이 허용된다면, 3촌 숙질 사이의 근친혼의 일례가 된다. 선덕여왕은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담당하거나 정치권력을 직접 행사한 것 같지는 않다.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조에서,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아 을제가 선덕여왕을 대신하여 섭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당서’ 신라전에서는 을제가 종실(宗室)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였는데, 이는 을제가 왕실의 최고 원로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즉위 4년(635) 10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를 보내어 주현(州縣)을 두루 돌며 위문케 하였고, 이어 3개월 뒤에 수품을 상대등에 임명하였음을 보아 정치적 실권은 이들 2인이 장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수품은 상대등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용수는 내성사신으로서 왕실세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도 7〜8세기 8명의 여제(女帝)가 등장하였는데, 최초의 스이코(推古)천황(592~628) 때 쇼토쿠(聖德)태자가 섭정하는 등 여제들 모두 아들이나 남자 형제들이 섭정하였음이 주목된다. 신라에서도 선덕여왕 때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며, 그를 뒤이은 진덕여왕 때의 정치적 실권은 확실히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에게 넘어가 있었다.  

선덕여왕 때 국내외 정세는 더욱 혼란한 상태가 되어갔다. 더욱 여왕은 노년으로 병이 들어 백고좌회 등의 불교신앙에 매달리게 되면서 권위는 극도로 추락했다. 또한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호전적인 연개소문과 의자왕이 집권하면서 신라에 대한 침공을 더욱 강화하였고, 당 태종은 구원을 요청하러간 사신에게 선덕여왕의 권위부족을 이유로 교체를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귀족세력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는 상태가 되었다. 신라 조정은 이러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의 하나를 불교신앙에서 찾게 되었는데, 바로 국가불교의 중심사찰인 황룡사에 9층목탑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종교적 상징시설을 통하여 여왕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국론을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염원의 발로였다. 황룡사 구층목탑의 공사는 선덕여왕 14년(645) 3월에 시작하여 1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공사 책임자는 내성의 장관 용수였다. 9층탑 조성발의는 승려 자장이 하였으나, 실제 그 공사의 인적 물적 자원의 조달과 공사의 감역을 담당한 것은 용수였던 것이다. 9층탑 조성 당시 용수의 나이는 그의 아버지 진지왕의 사망 연도가 579년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67세 이상의 고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덕여왕 사망 전후에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 때 국정을 장악한 인물은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 그리고 그와 처남 매부 사이인 김유신이었다. 이로써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의 왕통은 성골, 용수-춘추 계통은 진골이라 하여 신분의 차등을 설정하려는 것은 실상과 거리가 먼 이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43호 / 2020년 7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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