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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국토의 장엄이란

기자명 현진 스님

화려함보다 위엄·엄숙함 지닌 상태

장엄, 불교에서만 사용되다가
차츰 일반으로 보편화된 단어
범어로 ‘군대 사열’이란 의미

제10 장엄정토분 첫머리에 부처님께서 “여래가 옛적에 연등 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에 관해 얻은 것이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드린다.

‘금강경’이 총 32분으로 단락이 지어진 것은 경전이 저술될 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남북조 양나라의 소명태자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비록 내용상 32분의 단락이 경전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매 분(分)마다 글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할 필요는, 아니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제9 일상무상분에는, ‘금강경’이 반야부의 기본사상을 함축한 대승경전의 핵심과 같은 경전임에도 사쌍팔배(四雙八輩)라는 성문승의 계위를 언급하는 내용이 전체를 차지한다. 물론 그러한 계위가 대승교리를 어그러뜨린다거나 무아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은데, 제9분의 내용을 차분히 살펴보면 그 역시 무아론(無我論)을 회복하고 아상(我相)을 극복하자는 대승불교가 일어나며 내건 기치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미 밝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10분의 첫머리에 연등불 처소의 일이 부처님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혹시나 앞선 제9분의 가르침에서 ‘사쌍팔배'라는 알음알이에만 머물러있거나 그렇진 않더라도 아상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이들을 위한 부처님의 배려로 볼 수 있겠다. 심지어 여래도 연등불의 처소에서 얻은 법이 없거늘 사쌍팔배 그 어디에 얻었다할만한 법이 있다고 고집하며 상(相)을 부릴 수 있겠는가.

연이어 부처님께서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라는 물음에 수보리가 “아닙니다!” 하고는 “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 즉비장엄(卽非莊嚴), 시명장엄(是名莊嚴)”이라 답하는데, 이후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즉비논리(卽非論理)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시명(是名)’을 ‘그 이름이 ~일 뿐이다’로 보아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라고 해석하면 자칫 즉비논리가 아닌 일반문장으로 보여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참된 장엄이 아니고 실속은 없는 그 이름만 장엄일 뿐입니다’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해당 범문을 직역하면 ‘국토의 장엄이라는 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 말씀되었다. 그래서 국토의 장엄이라 일컬어진다’라고 되어 있기에 ‘A는 여래께서 A가 아니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A이다’라는 전형적인 즉비논리의 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것을 장엄이라 이름한다’로 옮겨야 한다.

즉비논리의 이해는 수행자 직관(直觀)의 문제로 남겨두어야 한다지만, 흔히 거론되는 해석법 한 가지를 들어보면 ‘A1[속제(俗諦)]은 A2[진제(眞諦)]가 아니므로 A3[속제(俗諦)]라고 한다’라는 방식이다. 불국토를 장엄한다 뭐한다는 것도 결국 해탈의 경지에서 보면 장엄이랄 그 무엇도 없는데, 아직 세속의 중생들에겐 그게 바로 장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말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해석한 것의 한 조각일 뿐이다.

사족으로, ‘불토의 장엄’에서 장엄이란 무엇인가? 장엄이란 말은 불교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다가 차츰 일반화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통용되는 장엄의 사전적 의미는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며 향이나 꽃 등을 부처님에게 올려 장식하는 일’로 되어있는데 불교의 영향이 다분한 해석이며, 한문의 자구적인 의미에 준해 ‘위엄이 있고 엄숙하다’로 정의되기도 한다.

장엄의 범어는 ‘vyūha'로서 'vi­(매우, 잘)'+‘√vah(옮기다, 보여주다)'에서 온 말인데, 1차적인 의미는 군대의 사열이나 열병 혹은 군대 그 자체를 가리킨다. 향이나 꽃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裝飾)에 해당하는 의미의 범어는 alaṅkāra(치장)나 maṇḍita(꾸며진) 및 rañjita(염색된) 등의 다양한 표현이 존재하므로 ‘브유허’가 단순히 꾸밈이나 장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장엄’이란 단지 화려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군대 열병식의 모습처럼 위엄과 엄숙함을 지니고 본래 갖추어야 할 모습을 제대로 갖춘 상태를 가리킨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3호 / 2020년 7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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