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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과 피 걷어내고 단 한 줄에 담은 통찰의 미학

  • 불서
  • 입력 2020.07.07 13:24
  • 호수 1544
  • 댓글 1

‘흰 눈 속의 붉은 동백’ / 태관 스님 / 서정시학

‘흰 눈 속의 붉은 동백’

‘입을 여는 순간 그르친다(開口卽錯)’거나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어그러진다(動念卽乖)’는 선가의 말처럼 형상과 음성을 넘어선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그렇다고 진리를 언어화하려는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진리가 언어를 떠나 있더라도 언어를 떠나 진리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를 가다듬고 정제하는 일은 수행과 맞닿아 있다. 불립문자와 언어도단을 말하는 선사들의 선시와 어록이 유독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북 영천 거조사 주지 태관 스님은 수행자이자 일행일수의 시인이다. 일상을 살아가며 얻어지는 통찰의 미학을 제목과 단 한 줄로 시로 드러낸다. 극히 간결하고 단출하지만 시의 제목과 내용이 연인처럼 어우러져 여운을 극대화시킨다.

‘요즘 나 이렇게 사요’라는 제목 아래쪽에 ‘물속에서 물 찾는 고기 맹키로’라는 한 줄 글귀가 시 전문이다. 또 ‘물이 들어올 때까지만’ 제목에 ‘소라 속에 고인 바람같이 살다 가자’, ‘진달래’라는 제목에 ‘길 잃은 어린 새 목젖’, ‘노을’이라는 제목에 ‘어혈이 고여 번지는 창백한 문풍지’, ‘기도’라는 제목에 ‘거미줄 치고 황소 오기를 기다리네’, ‘해는 서산마루에 급히 넘어가는데’라는 제목에 ‘천추만고 늙은 소는 여물만 우물거려’ 등등이 그것이다.

일상에서 얻어지는 한 줄의 시정(詩情). 짧지만 강렬하고 곱씹을수록 느낌이 새롭다. 날카롭게 벼려 일말의 군더더기마저 없애고 치열한 통찰의 과정을 거친 언어의 사리이다.

시가 실린 페이지 아래쪽에 써내려간 짤막한 해설도 흥미롭다. ‘파뿌리가’라는 제목의 시는 ‘파뿌리를 다듬고 있네’가 시의 전부다. 무슨 말인가 싶지만 ‘늙은 어미는 쉼이 없다. 한 줌 뙤약볕도 아깝다. 윤기는 없고 헝클어진 머릿결만 파뿌리처럼 하얗다’는 해설을 듣는 순간 한 줄의 시가 영상처럼 떠오르며 상념은 무한으로 확장된다. 또 ‘흔들래야 흔들 꼬리 없는’ 제목의 시에 ‘나는 개다’가 시의 전문. ‘거대한 권력 앞에 나는 개였지만 흔들 꼬리가 없어서 개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개다’라고 적힌 해설도 무심히 넘기기 어렵다.

“나에게 시를 쓰는 일은 부처로 가는 길”이라는 스님의 시에는 감성과 은유, 비판과 냉소, 사유와 실천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며 시의 묘미를 더한다. 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의 말마따나 살과 피를 다 발라내고 앙상하게 남은 뼈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심장 속에 바짝 다가선다. 1만2000원.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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