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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성불원 주지 현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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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7 16:17
  • 수정 2020.07.0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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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하는 게 맞다”

늑막염 치료차 입석사에 
들었다가 월정사서 출가

1990년대 복지불사 선두
13개 분야·직원 600여명

재소자 품은 지 40여년
“당사자, 가장 힘든 시간”

쿠마리 소녀 일화 감동
물·빵 건넨 사람이 ‘보살’

작은 정성으로 생명 살리는
‘보통의 보살’ 출현 기대

마음, 보살계로 보내면
이 땅은 정토로 조성 돼

현각 스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전법이 이뤄진다”며 “불법은 삶의 현장에서 꿈틀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직 이것 하나만 바라옵니다. 다함이 없는 삼보님이시여. 저희 정례를 받으시고 가피력을 내리시어, 온 누리의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옵소서!’

저녁 예불 올린 스님들 하나둘씩 처소로 돌아가고 적광전에는 두 스님만 남았다. 양양 낙산사 주지 소임 내려놓고 절에 든 진철 스님이 또 한 번 두 무릎을 꿇고 108배를 올린다. 영월 보덕사 주지 임기 마치고 산에 든 현각 스님도 정성스레 절을 올린다. 동안거 한 철 보내려 오대산으로 걸음한 두 스님, 108배 마친 후엔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서 도량을 거닐며 법담을 피워내곤 했다. 사문의 길을 걸으며 진중히 간직해온 이야기 한 토막 서로 나누다가, 떠오른 달 하나씩 품어 보는 게 산중에서 누리는 최고의 열락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법인이 공식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다. 당시만 해도 불교계는 이 분야에 별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철 스님은 일찌감치 ‘강릉자비영아원’을 세웠다.(1984) 진철 스님이 술회하듯, 그러나 묵직함이 실린 일언을 전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하셨지요. 각고의 정진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고, 타인의 안락을 위해 헌신하는 건 사회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복지불사는 사회 완성의 한 길입니다.”

외국에 나가 교학을 배워볼까, 선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까, 저잣거리로 들어가 포교에 매진할까 고민하던 중 출가 본사인 월정사를 찾은 현각 스님에게 진철 스님의 한 마디는 단박에 각인됐다. 8각9층석탑 부근에서 진철 스님과 헤어진 후 사색의 숲 속으로 깊이깊이 걸어 들어갔다. 

유치원이 낯설어 울고 있던 아이들도 스님이 내어 준 ‘까까머리’ 한 번 만지고 싶어 결국 엄마의 손을 놓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늑막염에 시달렸다. ‘1년을 쉬어보라’는 진단을 받고 휴양차 치악산 입석사로 들어갔다. 6개월쯤 지났을까?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천성으로 몸이 약한 자신이 사회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듯싶었다. 절집의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시야에 잡히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원력, 공덕, 깨달음에 담긴 의미들은 몰랐지만 ‘새로운 길에 들어서 보자!’는 심지만은 굳어져 갔다. 그윽이 뚫린 전나무 숲길 따라 ‘천년의 승지’라 불리는 오대산 산문을 열었다.(1970) 은사는 월정사 대가람을 일군 만화희찬(萬化 喜贊) 스님과 맺어졌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며 진철 스님의 전언을 곱씹은 현각 스님은 사유의 끝자락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정초했다. 

‘전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진다. 그러니 불법은 삶의 현장에서 꿈틀거려야 한다!’

그날 밤 떠오른 달은 유난히도 명징한 빛을 지상에 내려보냈다.

강원도 원주 외곽지역인 명륜동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성불원을 열었다.(1987) 운영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 1층은 세를 주고 불보살님과 함께 50평 남짓한 지하실로 내려갔다. 한 여름이면 방수 안 된 틈으로 물이 차 들어왔는데 방석이 떠다닐 정도였다. ‘내 절’이라 여겨보려 했던 불자들의 걸음도 차츰 줄어갔다. 

봉고차 운전대를 잡았다. 산회 후 돌아가는 신도들을 차에 태워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렸다. 차 속 작은 공간에 흐르는 어색함을 지워보려 소소한 이야기라도 꺼내 들었고, 그 소소함에 진솔함이 더해지며 승·재가는 심밀해져 갔다. 

3년 후 성불원을 증축해 부처님을 2층에 모시고 1층에 성불유치원을 개원했다.(1990) 신도들과 함께 원주지역 곳곳의 그늘진 곳을 찾아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보듬었다. 성불원의 자비행에 감복한 원주시는 원주시립복지관(1991), 명륜종합사회복지관(1992)을 현각 스님에게 위탁했고, 그 사이 성불유치원을 찾는 아이들은 줄을 이어 한 반에 40여명씩 입학했다.

원주의 심장으로 떠오른 성불원.

명륜동에서 토대를 탄탄히 다진 현각 스님은 이후 전 방위적 복지불사를 펼쳤다. 현재 어린이, 노숙인, 노인, 다문화가정, 성폭력피해여성 쉼터, 북한이탈주민 하나센터 등 13개 분야에 이르는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직원만도 600여명이다. 복지불사에 애쓴 세월만도 벌써 30여년이다. 진철 스님의 조언이 복지계에 뛰어든 계기가 되어주었다고 하지만 현각 스님만의 원력과 철학 없이는 지금의 대작불사를 이뤄낼 수는 없을 터였다.

“예토와 정토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 존재합니다.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마음이 중생계로 흐르면 예토를, 보살계로 흐르면 정토를 조성합니다. 아들·딸이 보살심을 일으키면 효심 가득한 집안이 되고, 국회의원이 보살심을 내면 국민섬기는 민주국회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현각 스님은 월정사 숲에서 보살심을 내었고, 그 마음을 복지계로 흘려보냈다. 이 땅에 정토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위탁시설 운영의 맹점 중 하나가 독자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불교계가 운영권을 확보하고 있어도 불교 색채가 짙은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관리감독이 점점 강화되다 보니 일각에서는 내심 위탁운영을 저어하고 있는 추세다.

“복지불사를 시작하며 임직원에게 당부한 게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가 하는 게 맞다.’ 그 초심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현각 스님은 1998년 강원도 자연학습원 원장에 취임하며 환경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2009년 이명박 정권 당시 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4대강 사업’ 저지에 총력을 기울인 바 있다. 2013년 ‘제18회 환경의날 기념식’에서 국민포장을 수상한 스님은 지금도 원주환경운동연합 자문위원을 맡으며 ‘환경이 곧 생명’임을 전하고 있다. 

“공기, 물, 땅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순간 재앙이 엄습해 옵니다. 올해 들어 회자된 ‘코로나19’의 역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베네치아 운하에 해파리가 떠다니고, 인도 뭄바이 샛강에 15만 마리의 홍학 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공장 가동을 멈추고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는 몇 주 만에 야생동물이 출현하고 대기 오염이 회복되는 상황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인간의 편의만을 위한 활동을 조금만 줄여도 환경 복원에 속도를 붙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주를 움직이는 핵심 인사로서 시민단체들의 고문 역할을 지금까지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현각 스님은 ‘화상경마장 설치 백지화’ ‘상지대 사태’ ‘아베 경제보복 철회’ 등의 사회운동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현각 스님의 도반은 성불유치원 어린이들이다.

그럼에도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재소자’를 품는 일이다. 보덕사 주지를 맡을 때인 1982년부터 원주교도소 교화위원과 불교 지도법사로 활동해온 현각 스님은 2016년 ‘제34회 교정대상 시상식’에서 자비상을 수상했다. 

“재소자 만날 때 당사자의 형량이나 죄목은 묻지 않습니다. 의도치 않게 선입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죗값을 치르는 건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의 곁에 서 있는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초파일을 앞두고 연등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교도소에 넣어주면 불자 재소자들은 ‘불자들의 방’에 모여 두 달 동안 온 정성을 다해 연꽃을 피워낸다. 

“철사나 못을 쓸 수 없기에 초코파이 박스를 접어 연꽃 틀을 잡고는 그 위에 연잎을 붙여갑니다. 300여개의 연등을 제작해 강단 등에 한 달 동안 걸어둡니다. 등표에 자기 이름도 쓰고, 교도소장 이름도 넣어준다고 합니다!”

4년 전부터는 성불원에 경전교실을 열었다. 토요일 오후 3시 열리는데 20여명이 수강한다고 한다. ‘천수경’ ‘신심명’ ‘증도가’ ‘선가귀감’ 등을 강의했는데 가장 큰 수혜를 받는 당사자는 현각 스님 자신이라고 한다.

“강원이나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책을 보기 어려웠는데 강좌를 열어서라도 다시 마주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같은 구절임에도 학인 때와는 다르게 와닿습니다.”

젊은 학인시절이 그리웠는지 현각 스님의 기억은 1977년의 겨울 한때에 잠시 머물렀다.

탄허 스님은 ‘화엄철학의 3대서’라 불리는 ‘화엄경’ ‘화엄론’ ‘화엄경소초’를 집대성해 현토·번역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집필(1956), 19년 만인 1975년 선보였다. 출간 기념 강의를 열어주었으면 하는 열망이 있었는데 저간의 사정으로 녹록치 않았다. 탄허 스님을 시봉했던 멱정(覓丁, 여익구) 스님과 교무를 맡고 있던 현각 스님이 의기투합해 사중의 큰스님과 주요 소임을 보고 있는 스님들에게 간청하고 설득했다. 결국 1977년 동안거 때 두 달간 ‘화엄경산림법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강백은 물론 젊은 수좌들까지 운집했다.

“탄허 큰스님의 강의는 정말이지 일품이었습니다. 심오한 이치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풀어주셨습니다. 점심공양 후 삼삼오오 모여 눈 내린 잣나무 숲길을 걷는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습니다. 저녁이면 학인들끼리 모여 토론도 하고, 나름 축적해 놓은 공부가 있으면 강의를 통해 대중에게 풀어놓기도 했습니다. 화엄도량에서만큼은 서로를 존중했기에 비구·비구니 경계도 사라졌습니다.”

만면에 띤 그윽한 미소는 그때의 환희를 되살리는 듯했다. 

현각 스님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했다.

“무엇인가를 탐하면서 살면 매일 즐거울 수 없습니다. 어떤 직책을 맡고 있든, 맡고 있지 않든, 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때 매일 즐겁습니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입니다. 가능한 ‘저 사람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은 들을 정도로는 살아야 합니다.”

현각 스님은 이 땅에 보살심이 넘쳐나기를 희망한다며 인도의 15세 소녀 쿠마리 일화를 전했다. 그 소녀는 지난 5월 ‘코로나 국가봉쇄’ 속에서도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자전거에 태우고 뉴델리 외곽 구르가온에서 1200km 떨어진 고향 다르방가를 일주일 만에 도착했던 인물로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단 한 차례 트럭을 얻어 탔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얻은 물과 음식으로 근근이 버티며 페달을 밟아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트럭의 한 자리를 내어준 사람, 물 한 컵, 빵 한 조각이라도 건넨 사람들이 보살입니다. 엄청난 이적이 아닌, 작은 정성으로 생명을 살리는 ‘보통의 보살’입니다. 그 보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쿠마리는 결코 7일 만에 고향땅을 밟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대가 요청하는 건 ‘보통의 보살님들’이라는 뜻일 터다.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고 보태려는 사람들이다. 

현각 스님의 여정을 돌아보니 그동안 성불원을 중심으로 이웃들과 함께 청정국토·청정심 조성에 묵묵히 헌신했음을 알겠다. ‘대정장(大正藏) 불국품’에 새겨진 대목이 스쳐간다.

‘만약 보살이 청정한 국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청정해야 하나니, 그 마음이 청정함에 따라 곧 불토가 청정해지느니라.’

정토구현에 평생을 헌신해온 현각 스님이 예불 때마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정례(頂禮)’는 고귀하다. 이 땅에 수많은 ‘보통의 불보살님’이 출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얹어져 있기 때문이다. ‘생명 깃든 모든 것은 행복하기’를 바라는 현각 스님의 마음은 오늘도 복지계로 흐르고 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현각 스님은

1970  희찬 스님을 은사로 월정사서 출가. 
1974  해인사승가대학 졸업. 
1987∼현재 불교회관 성불원·성불유치원 원장.
1991∼2012 원주복지원 원장.
1992∼현재 명륜종합사회복지관 관장.
1993∼현재 원주교도소 종교교화위원.
1993∼현재 환경운동연합 고문.
1997∼2000 21세기 새 시대를 위한 원주시민회 공동대표.
1998∼현재 강원도 자연학습원 원장.
2003∼2012 강릉시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
2012∼현재 전국자연환경연수원 협의회 회장.
2013∼현재 강원도 사립유치원연합회 회장.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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