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응무소주(應無所住)
25. 응무소주(應無所住)
  • 현진 스님
  • 승인 2020.07.08 10:22
  • 호수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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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집착하지 말라

보살이 육바라밀 수행할 때
어떤 경계도 걸리지말라 의미
아상 버리라는 금강경 요지

앞서 제4묘행무주법에서 범어 와스뚜(vastu)를 언급하며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살펴보았는데, 비록 ‘응무소주행어보시’라는 여덟 글자로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앞에 내용상 중요한 ‘어법(於法)'이 있기에 온전히는 “보살은 法에 있어서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이다. 여기서 말한 ‘法’은 범어의 다르마(dharma)가 아닌 와스뚜(vastu)를 옮긴 것이다. 와스뚜는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인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을 총칭하는 말로서, 변화무상한 흐름의 한 단락을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여 집착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반적인 의미로는 사물이나 물질 등 실재하는 것이나 혹은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와스뚜를 구마라집 스님은 ‘法’으로 옮기고 현장 스님은 ‘事’로 옮겼다. 구마라집 스님이 육경의 총칭인 와스뚜를 육경 가운데 하나인 法과 동일한 글자로 옮긴 것은 두 글자가 갖는 일반적인 의미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산즈냐(saṁjñā, 생각)와 락샤나(lakṣaṇa, 모습)를 동일한 ‘相’으로 옮긴 것과 유사하게 혼동을 주면서도 나름대로 철학적 사고를 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적잖은 혼란을 야기하는 번역어에 불만을 가진 현장 스님은 산즈냐를 ‘想'으로 옮기고 락샤나를 ‘相'으로 옮긴 것처럼 와스뚜의 일반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그에 적당한 번역어라 여긴 事[일삼다]로 옮긴 것 같다.

제4분에 ‘응무소주’가 포함된 문구의 의미는, 대승교리를 따르는 수행자인 보살이라면 보시를 비롯한 육바라밀을 행하여 해탈로 나아가고자 할 때 색성향미촉법 등 육근의 대상인 육경의 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그 어떤 무엇에도 집착되어서는 안 됨을 말하고 있다.

묘행무주분의 ‘응무소주’ 문구와 유사한 내용이 제10 장엄정토분에도 나온다.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으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이라는 부분인데, 해당 문구의 전체문장은 ‘형색[色]이나 소리[聲]나 냄새[香]나 맛[味]이나 감촉[觸]이나 법(法) 그 어디에도 머물러 마음을 내어선 안 되나니,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라고 하였으니, 제4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시를 행한다[行布施]는 말이 마음을 낸다[生其心]로 바뀌어져 있을 뿐이다.

제14 이상적멸분에도 응무소주이행보시(無所住而行布施,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로 유사한 문구가 존재한다. 제14분에서의 해당내용은 제4분과 제10분에서 반복된 내용이 다시 언급된 것이어서 그런지 구마라집 스님은 불응주색보시(不應住色布施, 응당 형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로 대폭 축소시켜 놓았는데, 범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해놓은 현장 스님의 한역본을 옮겨보면 ‘보살은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할지니, 색성향미촉법 어디에도 머문 채 보시를 행해선 안 된다’로 이 역시 위의 두 곳과 내용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제법 떨어져있는 세 곳인 제4분과 제10분 및 제14분에 범어원문을 기준으로 거의 동일한 내용의 문장이 반복되어 있다는 것은 그 내용에 경전 전체에서 강조하는 의미가 담겼을 것이란 것은 쉽게 유추된다. ‘대승보살로서 해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서 보시를 비롯한 육바라밀을 행할 때 색성향미촉법인 육경(六境)의 그 어떤 경계에도 걸리거나 머물지 말고 수행해 나아가기를 권함’이 다시 또 반복해 보는 그 내용이다.

앞에서 '와스뚜'를 말하고 뒤에선 두 곳 다 ‘육경'을 언급하였는데 와스뚜가 곧 육경이므로 서로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요, 각 문장의 끄트머리를 차지하는 문구는 ‘행어보시(行於布施)’와 ‘이생기심(而生其心)’ 및 ‘이행보시(而行布施)’이라 조금은 다른 듯 하지만 결국 보시바라밀을 필두로 하는 육바라밀을 행하는 마음 내기를 권하는 내용에 다름이 없다. 바라밀, 즉 ‘바라밀다(pāramitā)’는 해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는 의미이니, 무아론을 회복시켜 아상을 없애고서 그렇게 생긴 지혜를 뗏목삼아 피안으로 어서 건너가자는 ‘금강경’의 요지가 이 문장에 담겨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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