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같다’와 ‘다르다’
14. ‘같다’와 ‘다르다’
  • 홍창성 교수
  • 승인 2020.07.08 13:42
  • 호수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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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구와 나이 든 김구는 동일한 인격체일까

서양에선 자기동일성 원리를 너무도 자명한 근본 진리 간주
만물이 무상하다는 불교에선 사물의 통시간적 동일성 부정
만물은 연기하되 자성 없이 공하므로 그러그러하게 존재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백 명의 스님이 있으면 백 가지 다른 불교가 있다’는 말이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백 명의 철학자를 모아 놓고 아무 철학자에게 ‘당신은 여기 있는 철학자 가운데 누구에게 반대합니까?’라고 질문하면 누구나 ‘물론 다른 99명 모두입니다’라고 답한다는 농담도 있다. 이처럼 서로 끝없이 비판하고 반대하는 작업이 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 모두가 받아들이는 극소수의 진리 가운데 하나가 ‘모든 것은 스스로와 동일하다’라는 자기동일성 원리(principle of self-identity)다. 서양에서는 너무도 자명하고 근본적인 진리여서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현대철학은 별다른 논증 없이 동일성의 원리(principle of identity)를 개별화의 원리(principle of individuation)와 마찬가지로 간주하며 논의를 진행한다. 거창한 단어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우리를 혼동시킬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우리말로 풀어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같다’는 ‘다르다’ 또는 ‘달라서 구별된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 둘은 서로 반대어로서 상관관계에 있다. 이 점만 깨달으면 동일성의 원리가 바로 개별화의 원리가 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같음의 원리’와 ‘다름의 원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철학의 나쁜 버릇 가운데 하나가 공연히 어려운 말로 쉬운 이야기를 엉클어 놓는다는 것인데, 불자라면 속지 말아야 하겠다.

철학에서 동일성을 논의할 때 애용하는 예로 ‘일란성 쌍둥이는 동일하지 않다(Identical twins are not identical)’가 있다. 얼핏 어리둥절한 문장인데, 나는 이 예보다는 ‘똑같이 생긴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질문으로 논의를 진행하기 좋아한다. 이 두 동전은 같은가, 다른가? 두 동전은 가지고 있는 속성이 모두 같기 때문에 질적(質的)으로는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둘 다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에 수적(數的)으로는 각각 하나로서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다른 동전들이다. 그래서 두 동전은 질적으로는 같지만 수적으로는 다르다. 앞에서 든 일란성 쌍둥이도 생긴 모습 등은 모두 같지만 각각 독립된 개체로서 다른 존재자들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질적으로 같고(the same) 수적으로 하나여야(one) 동일하다(identical=one and the same)고 인정한다. 그래서 ‘동일하다’는 말에 일상 언어에서의 ‘같다’라는 말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이런 기준을 만족시키는 예를 몇 들어 보겠다.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 선생의 호는 백범이다. 우리는 백범이 김구라는 사실을 안다. 백범은 김구와 동일하다(백범=김구). 존재했던 인물은 한 분이었고, 그분의 성함이 김구 그리고 호가 백범이었다. 수적으로 하나인 존재자가 이름을 둘 가졌었다. 이때 백범이 가진 모든 속성을 김구 선생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일성의 기준이 충족된다. 춘원과 이광수, 그리고 단재와 신채호 사이에도 동일성이 성립한다. 따지고 보면, 수적으로 하나인 존재자라면 당연히 모든 속성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스스로와 동일하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철학에서 몇 안 되는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진리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사물에 변화가 생기기 마련인데도 모든 것이 여전히 동일하게 머무를까? 18세기 영국 교회의 주교였던 버틀러는 동일성에는 ‘느슨한(loose)’ 동일성과 ‘철저한(strict)’ 동일성이 있다고 보았다. 느슨한 동일성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시간이 흘러도 같은 사물’이라고 말할 때의 동일성이다. 뜰 앞에 잣나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키가 몇 배 커지고 가지도 넓게 퍼져 30년 전 같은 자리에 있던 어린 잣나무보다 그 구성 요소 등이 전적으로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같은 잣나무로 본다. 그 옆에서 함께 세월을 견뎌 온 바위도 온갖 풍파에 닳고 부서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오래 전 그 바위로 간주한다. 우리는 그밖에 많은 사물도 이렇게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의 같음이 버틀러가 말하는 느슨한 동일성이다.

그런데 보다 철학적으로 철저한 의미에서의 동일성 기준에 의하면 위에서 든 예들은 모두 자격미달로 탈락하고 만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물의 구성요소에 변화가 생기면 그것은 다른 개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 것과 동일하지 않다. 이 세상 만물은 시간이 흐르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오직 느슨한 의미에서만 동일성을 유지할 뿐이다. 그런데 버틀러는 우리 개인 인격체(person)는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변화를 모두 겪더라도 철저하고 엄밀한 철학적 의미에서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어린 플라톤이나 나이 든 플라톤은 전적으로 동일한 인격체이고, 청년 김구와 사망 직전의 김구 또한 완벽히 동일한 인격체다. 버틀러는 아무 특별한 논증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인격체의 통(通)시간적(diachronic) 동일성을 주장했는데, 이는 분명 교회의 주교였던 그에게 영혼(soul) 또는 자아(self)의 존재가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영혼 또는 자아의 존재가 의심의 여지없이 논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사물의 통시간적 동일성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스스로와 동일하다’는 주장이 동시적으로는 (synchronically)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일까? 말하자면, 한 찰나에는 모든 것이 스스로와 동일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모든 사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하여 공하고, 따라서 아무 것도 스스로 실재하는 실체일 수 없다고 본다. ‘모든 것이 스스로와 동일하다’는 주장에서 그런 ‘것’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하지도 않아 환(幻)에 불과한 사물에 대한 자기동일성 논의는 별다른 생산적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면 만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굳이 답변하자면, 연기하면서 자성 없이 공하여 그러그러하게-여여(如如)하게-존재한다. 뜻이 있는 단어를 쓰며 표현하자면 분별을 초래하여 연기와 공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에 그저 ‘그러그러하게 있다’고 할 뿐이다. 혹자는 ‘如如하다’를 ‘같다, 같다’로 해석하는데, 사물에는 그런 같음이나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如’는 ‘같을 如’가 아니라 ‘그럴 如’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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