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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백남준의 ‘TV 붓다’  : 관불삼매의 재해석

기자명 주수완

백남준 보다 부처님 가르침이 훨씬 더 전위적

1984년 인공위성 양방향 연결 전세계 생중계 퍼포먼스 선보여
TV 속 부처, 사실 나 자신 바로 본 순간 붓다 된 것 표현하기도
불상은 무명, 브라운관은 행, 전파는 색으로 이미지 형성된 것

백남준, ‘TV 붓다’,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1974.

백남준이 불교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불교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 ‘TV 붓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고, 실제 유사한 작품을 여럿 만들어 현재 전 세계의 많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고, 전위적이며 기괴한 예술가이지만, 그 바탕에는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구체적으로는 선(禪)에 근간을 둔 어떤 확고한 이론적 체계를 지닌 예술가로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TV와 마주 앉은 붓다라니, 언뜻 TV를 시청하고 있는 붓다 같지만, 사실 이 붓다는 TV 속에 비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자아와의 마주함”에 그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굳이 TV를 사용하지 않고 거울만으로도 그러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거울과 자신은 보다 직접적인 마주함이지만, TV 속 자아는 ‘카메라’라는 제3의 눈을 통해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전기적 신호로 한번 변환되었다가 TV 안에서 재구성되는 개념인 것이다. 때문에 거울과의 마주함은 바로 앞에서 이루어지지만, TV 안의 나와의 마주함은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카메라로 촬영된 나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지구를 한바퀴 돈 다음 비로소 내 앞에 있는 TV의 브라운관에 비춰질 수도 있다.

실제로 백남준은 1984년 정월 초하루에 선보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인공위성으로 뉴욕, 파리를 실시한 양방향으로 연결하고, 이를 한국에서도 생중계하는 등 전세계를 하나로 묶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바 있었다. 전파는 빛의 속도로 이동하므로 아무리 돌고 돌아 내 앞의 브라운관에 투영된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실시간으로 나의 모습을 반영한다. 지금의 인터넷 시대에는 간단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인공위성을 통해서나 가능한 거대한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은 이러한 공간적 거리를 초월한 실시간적 소통이 가져올 변화를 예견하고 그 가치를 발견한 선구적인 예술가였다.
 

‘TV 붓다’와 함께 한 백남준, 뉴욕 MoMA, 1974.

‘TV 붓다’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었든, 여러 측면에서 불교적인 개념을 연상케 한다. 우선 ‘관불수행’을 떠올릴 수 있다. ‘관불(觀佛)’, 즉 부처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수행을 말한다. 내 앞에 부처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그 영상을 떠올리는 연습을 하면, 처음에는 영상이, 그 다음에는 실제 부처가 나타난다고 하는 수행법이다. 언뜻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지금처럼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세상과 달리 글을 읽기도, 그리고 아예 책을 구입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오로지 직관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향해 수행할 수 있도록 부처님이 제시한 참선의 한 방법이다. 

과연 이렇게 떠오른 부처의 이미지가 진짜 부처님일까? 사실상 그런 환영은 참선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상일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우리 모두가 부처라고 했으므로,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부처의 이미지는 사실 내 안에 잠재된 부처의 모습이 바깥으로 투영된 셈이 된다. 이를 통해 나 자신이 사실은 부처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내면의 나 자신을 불러내 보면, 그것이 곧 부처임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 정도로 풀어볼 수 있겠다.

아마도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행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일 것이다. ‘TV 붓다’ 속 부처는 영상 속 또다른 부처를 보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바로 본 순간 붓다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스로가 붓다이기 때문에 영상에 붓다로 비춰진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상에 붓다로 비춰졌기 때문에 스스로가 붓다임을 깨닫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일까. 백남준은 그것을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TV 붓다’에서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불교적 개념은 연기(緣起)이다. 불교에서의 연기는 인드라망을 따라 중중무진 퍼져나가지만, 이 작품에서는 전기신호, 그리고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전파를 타고 중중무진 퍼져나간다. TV를 보고 있는 주체가 불상인 것 같지만, 불상은 여기서 사실 카메라라는 눈이 읽어 들이고 있는 대상일 뿐이고, TV는 시신경을 따라 뇌에 인식된, 즉 실제 관람자로서의 ‘나’일 수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의 시작으로서 물질적 존재인 불상은 무명(無明)이고, 카메라와 브라운관의 설치는 행(行)이며, 그로인해 전파로 변환되는 식(識)이 일어났으며, 브라운관 속에 명색(名色)이라는 잠재적인 형태로서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고 느낌을 얻어 수(受)를 경험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작품을 갖고 싶은 마음인 애(愛)도 겪을 것이다.

이 복잡한 과정을 부처님은 12연기로 꿰뚫어 보셨고, 이 작품은 더 많은 브라운관 대신 오직 하나의 브라운관을 통해 불상과 브라운관이 1:1로 대면하게 만들었다. 결국 단순화된 형태로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모듈을 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남준의 ‘TV 붓다’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전위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전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세상이 아직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고, 그 가르침을 표현할 테크닉도 부족했던 것이었다. 백남준은 비로소 그 말씀의 세계를 가장 전통적인 방법, 즉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구현했을 뿐이다. 대부분 위대한 예술가들이 늘 그래왔지만, 백남준은 가장 전위적이면서도 가장 전통적인 장인이었던 셈이다.

이제 우리는 현대사회가 인드라망 대신 인터넷망으로 중중무진 이어져 무수한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있으며, 코로나로 인해 나의 작은 행위 하나가 오프라인 상에서 세상에 얼마나 긴밀하게 연쇄반응을 일으키는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부처님의 말씀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의 이 시대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계신 것 같다. ‘TV 붓다’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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