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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㊿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④ - (1) ‘중고’시기 왕위계승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위상 - 하

태종무열왕 즉위 이후 명실상부한 전제적인 중대왕권 구축

진평왕‧선덕여왕 계통과 용수‧김춘추 계통 신분상 차이 없어
진평왕 시절 왕권 강화 핵심세력은 용수, 아들 춘추로 이어져
국제무대에서 뛰어난 외교술…과거와 다른 강력한 왕권 출현

국보25호 태종무열왕릉비. 비몸은 사라지고 거북받침돌 위에 머릿돌만 남아있다.
국보25호 태종무열왕릉비. 비몸은 사라지고 거북받침돌 위에 머릿돌만 남아있다.

신라 ‘중고’ 시기 왕실은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의 계통과 용수(용춘)-김춘추의 계통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성골, 후자는 진골로서 신분상의 차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혈통의 면에서 진평왕과 용수는 함께 진흥왕의 손자로서 4촌 종형제 사이였다. 또한 진평왕이 용수를 사위로 받아들이는 근친혼으로 친・인척의 중복된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김춘추는 부계로 진평왕의 5촌 당질이며, 모계로 외손자가 되었다. 그리고 선덕여왕과는 부계로 6촌 남매 사이였으며, 동시에 모계로는 3촌 이질의 사이가 되었다. 결국 두 계통은 내외간의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까운 왕실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양자를 신분상으로 구분하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왕권의 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왕실의 혈연적인 관계와 함께 양자의 정치적 관계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의 재위기간에 용수-춘추 부자가 실제적으로 담당했던 정치적 역할과 위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용수는 25대 진지왕(576~579)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나, 진지왕이 즉위 4년 만에 폐위되고 사망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였다. 용수의 생몰년은 전해주는 기록이 없지만 아버지 진지왕이 사망한 연도(579)를 고려하면, 황룡사 9층목탑의 조성사업을 주관한 선덕여왕 14년(645) 당시 용수의 나이는 적어도 67세 이상의 고령이었을 것으로 계산된다. 따라서 용수의 출생 시기는 진지왕의 말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삼국유사’권1 도화녀・비형랑조에서는 진지왕이 사망한 뒤에 유복자로 출생하였음을 암시해 주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지왕의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둘째 진지왕은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나라사람들이 왕을 폐위시켰다. 셋째 왕이 폐위되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 그 혼령이 생전에 마음을 두었던 사량부 민가의 여인 도화랑(桃花娘)과 관계하여 비형(鼻荊)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넷째 진평왕이 궁중에 데려와 길렀는데, 15살이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다섯째 비형랑은 매일 밤마다 귀신들과 놀던 중에 왕의 명으로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다리(鬼橋)를 놓았다. 여섯째 비형랑이 데려온 귀신 길달(吉達)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다. 일곱째 길달은 각간 임종(林宗)의 아들이 되었는데,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누문(吉達門)을 세우게 했다.

이상의 내용에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인 허구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가장 주목할 내용은 사량부의 여인에게서 유복자로 태어난 비형랑이 궁중에서 성장하였으며, 비형랑과 그가 데려온 귀신 길달이 집사의 벼슬을 받았는데, 다리나 누문 등의 건축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집사는 왕의 가신적(家臣的) 성격을 띠면서 궁중의 업무를 관장하는 근시직(近侍職)으로 이해되는데, 이 집사의 직책이 발전 분화하면 사적으로는 왕궁과 왕실의 관리를 담당하는 내성(內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는 국왕과 중앙 행정관부의 중간에서 왕명을 받들어 여러 관부를 통제하는 집사부(執事部)로 확대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앞에서 인용한 도화녀・비형랑조의 내용은 용수와 관련된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된 설화인데, 그 핵심적인 사실은 용수가 진평왕의 측근으로서 가신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용수가 역사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진평왕 44년(622) 내성의 장관인 사신(私臣) 직책을 담당하면서 부터였다. 진평왕은 재위 전반기에 위화부(位和府)・조부(調府)・승부(乘府)・예부(禮部)・영객부(領客府) 등의 일반 행정관부를 설치하고, 후반기에 내성과 시위부(侍衛府) 등의 왕궁 관련 관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용수가 내성의 사신으로 임명된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에 앞서 진평왕 7년(595) 왕궁인 대궁(大宮)과 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에는 관리책임자로서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성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궐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고, 용수가 초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 내성 아래에는 수많은 내정(內廷)기구들이 예속되었는데, 뒷날 왕권의 강화과정에 따라 계속 증설되어 갔으며, 단순히 왕궁의 관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관장하였으며, 특히 왕실의 불사(佛事)를 담당하였다. 또한 내성의 장관은 병부(兵部)의 장관인 병부령을 겸직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용수는 이 직책을 통하여 정치권력의 핵심인물로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진평왕 51년(629)에 용수는 대장군으로서 서현(舒玄)・유신(庾信) 부자와 함께 출전하여 낭비성(娘臂城, 충북 청주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선덕여왕 4년(635) 10월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함께 지방의 주현을 두루 돌며 백성을 위무하는 등 실력자로 활동하였다. 수품은 3개월 뒤 상대등이 되는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수품이 귀족세력을 대표하였던 반면에 용수는 왕실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국가권력을 양분함으로써 그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수는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선덕여왕의 권위회복을 위하여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9층탑의 조성공사를 맡아서 1년 만에 준공하였다. 내성이 왕실의 불사를 전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덕여왕 3년(634)의 분황사(芬皇寺)와 다음해 영묘사(靈廟寺) 등 왕실사원 조성도 용수가 주관하였을 것으로 본다.

용수는 황룡사 9층탑 조성 때의 나이가 적어도 67세 이상의 고령이었음을 고려하면,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추측되며, 정치적 실권은 아들인 김춘추(603~661)로 계승되었다. 김춘추는 앞서 선덕여왕 11년(642) 서쪽 국경선의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당나라와의 교통의 관문인 당항성(党項城, 경기도 남양)이 고구려・백제의 연합군에게 뺏기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김춘추가 정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진덕여왕이 즉위한 이후였다. 선덕여왕 16년(547) 정월 선덕여왕에 정면 도전한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 중에 여왕은 세상을 떠났으나, 반란은 김유신 등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왕위를 계승한 진덕여왕 원년(647) 정월 알천(閼川)이 상대등이 되어 명목상 정치계의 수장이 되었으나, 실제적으로 군사권은 비담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김유신이 장악하게 되었고, 정치의 실권도 김유신의 지원을 받는 김춘추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아버지 용수로부터 왕실관리의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그 위에 처남 매부 관계로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정치권력의 핵심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 연합세력의 정치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자료가 ‘삼국유사’권1 진덕왕조의 우지암(于知巖)회의 설화이다. 그 설화 내용은 진덕여왕대 남산 우지암의 회의에 알천(閼川)・임종(林宗)・술종(述宗)・무림(武林)・염장(廉長)・유신(庾信) 등 6인의 최고 원로 귀족들이 참석하였는데, 알천이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모두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는 것인데, 형식상의 대표는 상대등의 직위를 가진 알천이었으나, 실권은 김유신이 장악하고 있었음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선덕여왕대부터 대내외적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은 신라는 진덕여왕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삼국통일 전쟁기로 돌입하게 되는데, 삼국통일 전쟁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 사이의 항쟁으로 그치지 않고, 대륙의 당과 돌궐・거란・말갈, 그리고 바다 건너의 왜까지 가담하게 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전쟁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군사력과 함께 외교력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에서 군사력은 김유신이 장악하여 고구려・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는 반면, 외교정책의 수립과 실천은 김춘추가 담당하여 고구려・왜・당을 넘나들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였다. 김춘추는 일찍이 선덕여왕 11년(642)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과 담판을 시도한 바 있었고, 진덕여왕 원년(647)에는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다음해 당에 가서 마침내 나당군사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김춘추의 외교적인 활동에서 주목할 내용은 정치와 군사 분야 못지않게 문화 분야의 외교를 중시한 것이었다. 당태종과의 회담에서 군사협정에 앞서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고, 당태종이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된 ‘진서(晉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군사협정을 체결한 직후에는 당의 장복(章服) 제도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였는데, 당의 의복제도 도입은 일본에서도 경계하였던 사실이 확인될 정도로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김춘추는 당태종으로부터 특진관(特進官, 문산관 정2품), 그의 셋째 아들 문왕(文王)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직사관 종3품)의 관작을 받았는데, 선덕여왕이 추증받은 광록대부(光祿大夫, 문산관 종2품), 진덕여왕이 책봉받은 주국(柱國, 훈위 종2품)보다 1급 높은 품계였음을 고려하면 당에서의 김춘추에 대한 대우가 이미 본국의 국왕보다 더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춘추는 귀국하면서 불과 17~18세의 어린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 남겨놓았는데, 숙위 파견은 외교뿐만 아니라 당 문화 수입의 주요한 창구가 되었다.

김춘추는 귀국한 뒤 진덕여왕 3년(649) 의관(衣冠)제도, 4년(650) 아홀(牙笏) 착용, 당 고종대의 연호인 영휘(永徽) 사용, 5년(651) 조원전(朝元殿)에서의 신년하례 의식 거행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의 설치, 6년(652) 좌리방부(左理方府)의 설치 등 일련의 문화개혁과 정치개혁을 통해 집권기반을 닦았다. 또한 당과의 친선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진덕여왕 4년(650) 김춘추는 큰 아들 법민(法敏, 뒷날의 文武王)을 당에 보내어 당의 황실을 칭송하는 내용의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바치었고, 6년(652)에는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을 당에 보내어 숙위케 하였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3년(656)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오자, 셋째 아들 문왕을 대신 보내는 등 김춘추와 그의 아들들이 대당외교를 독점하였다. 특히 김인문은 효소왕 3년(694) 당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번 당에 왕래하였고, 당에 머물러 숙위한 기간이 모두 22년이나 되었을 정도로 대당외교를 주도하였다.

김춘추에 의한 정치개혁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집사부의 설치였는데, 집사부는 행정체계상으로 여러 관서를 통제하는 지위를 차지한 신라의 최고관부라고 할 수 있다. 진덕여왕 5년 집사부의 설치로 국가권력은 이제 왕실의 관리를 담당한 내성사신,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과 함께 3각의 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상대등 알천을 제치고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여 아들과 측근들을 내성사신・집사부중시・상대등에 포열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전제적인 중대왕권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45호 / 2020년 7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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