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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행유의 ‘노승탁족’

기자명 손태호

한바탕 울력 마치고 차가운 개울에 발 담그다

선조들 한여름 피서로 계곡에 발 담그는 탁족 즐겨
발 씻는다는 건 속세 얽매이지 않는 초탈한 삶 표현
흐르는 물 관조하며 마음 다스리는 정신수양 의미도

이행유 作 ‘노승탁족도’, 14.7×29.8cm, 비단에 담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행유 作 ‘노승탁족도’, 14.7×29.8cm, 비단에 담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마전선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비를 뿌리니 햇볕은 변화무쌍하고 바람도 많이 부는 초여름 날씨입니다. 절기상으로 소서(小暑)가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것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니 모두 국내여행으로 휴가계획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벌써 강원도와 제주도 등 유명 여행지의 숙박시설은 전부 예약이 끝났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여름 휴양을 떠올리면 바다보다는 계곡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릴적 동네 아이들과 작은 개울에서 올챙이, 가재 잡으며 놀던 기억이 남아있어 그런가 봅니다. 

계곡의 물놀이를 떠올리면 자연히 연상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좋아했던 ‘탁족도’ 그림들입니다. 우리나라 옛 어른들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피서의 일종으로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즐겼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린 그림을 ‘탁족도’라 하는데 ‘탁족도’는 중국 북송 이후 고사인물도(高士人物圖)의 주요 화제(畵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이어져 여러 점의 그림으로 남겨졌습니다. 형식은 대개 개울에서 발을 씻고 있는 선비의 모습으로 선비를 시종하는 동자가 함께 그려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탁족도’ 중 선비가 아닌 스님의 탁족 모습이 그려진 ‘노승탁족도’를 감상해보겠습니다.

나무가 울창한 어느 깊은 산속 계곡입니다. 굵은 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물오른 잎이 무성한 가지가 옆으로 길게 펼쳐지는데 그 아래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스님 한 분이 개울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습니다. 의복이 가사 장삼이 아니니 스님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카락을 저렇게 짧게 깎은 사람은 스님들밖에 없었습니다. 물 왼쪽으로 물보라가 일어나니 물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모습인데 고요할 것만 같은 정적인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스님 앞쪽 개울 건너 낮지만 진하게 그려진 바위가 하나 있고, 스님 우측 바로 아래도 진한 바위가 있습니다. 이 두 바위와 나무 기둥, 가지 끝 진한 잎을 선으로 그으면 사각의 공간이 만들어지는데 그 안에 인물을 배치했습니다. 주변 경물을 농묵으로 진하게 그리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했는데 이는 인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매와 소박한 옷이 인상적인데 이 시대 인물산수화에서 보이는 작은 인물 표현보다 크게 그려 이 작품은 인물산수화가 아니라 풍속화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두 눈을 아래로 감고 양 손으로 좌측 무릎을 닦고 있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좌측에는 깊은 계곡임을 암시하는 바위와 나무들이 있고 낙관은 종보(宗甫)라고 쓰고 주문인장을 찍었습니다.

탁족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중 하나였습니다. 일반인들에게 탁족이 단순한 피서에 지나지 않았다면, 선비들에게는 피서의 차원을 넘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즉, ‘발을 씻는다’는 것은 ‘흐르는 물을 관조하며 마음을 다스린다는 정신 수양이며, 풍진에 찌든 세상을 멀리하고 은둔하며 고답(高踏)을 추구한다’는 인격수양이나 처신 또는 은둔의 상징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렇게 탁족의 의미가 받아들여진 이유는 중국 고전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詞)’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창량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량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라지더니 반복해서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탁영탁족’이란 ‘갓끈’과 ‘발을 물에 씻는다’는 뜻으로,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한 삶을 비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사실 그렇게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이 노래는 억울하게 쫓겨난 굴원(屈原)에게 어부가 부른 노래로, 세상의 맑고 흐림에 따라 이득을 챙기며 제 몸을 보호할 것이지, 어리석게 마음을 드러내어 쫓겨나고 말았다고 굴원을 조롱한 노래입니다. 결국 굴원은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로 끝을 맸습니다. 이러한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조선의 선비들은 유가적으로만 해석해서 모든 일은 스스로의 처신 여하에 달렸으므로 각기 수신(修身)에 힘써야 한다며 선비의 초탈함으로 변형하여 받아들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탁족도’는 이런 유가적 해석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이 ‘노승탁족’은 처신이나 수신에 의미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거나 입신양명의 뜻이 전혀 읽히지 않습니다. 스님의 삶은 사실 그런 것과 상관없습니다. 처세를 잘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수신으로 입신양명할 일도 없습니다. 오직 스님에게는 정진과 수행만 있을 뿐입니다. 한 여름 한바탕 울력을 마치고 개울로 와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늘 한쪽에 남아있는 번뇌도 사라지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이왕 온 김에 손으로 무릎과 허벅지의 때도 닦습니다. 이것은 수신도 처세도 아닌 그냥 닦고 씻을 뿐입니다. 그 자체로 열심히 좋고 나쁘고, 물이 맑고 탁하고 분별하지 않고 오직 그리할 뿐입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관아재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그림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2013년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석농화원(石農畵苑)’이 발견되고 책이 번역되면서 이행유(李行有)라는 화가가 조영석의 그림을 방작하여 그린 그림임이 밝혀졌습니다. 직접 작품을 감상했던 단원 김홍도의 증언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행유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진 바가 없지만 어릴적 이름이 ‘수몽’이고 글씨도 잘 썼다고 합니다. 중국 고사에 ‘어부가’가 있다는 우리나라 불교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이 씻을 적에 탁한 물을 맑게 할 줄 모르는 것과 같다(如人以水淨器 不知能淨濁水也). 물이 맑으면 그림자가 맑고 물이 혼탁하면 그림자가 어둡다(水淨影明 水濁影昏).”

‘노승탁족도’를 감상하면서 한 여름 더위에 모두 무탈하고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45호 / 2020년 7월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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