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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

“어른스님 가르침 이정표 삼아 내 마음 밝은 것 꼭 찾아야”

독립운동 지원한 용성 스님 법맥 동산, 성철 스님으로 이어져
어른스님들 삶은 출·재가 모두에 삶의 방향 제시하는 나침반
누님 제도한 나옹 스님 일화 가슴에 담아 스스로 수행정진해야

저의 은사스님은 여러분께서 다 잘 아시는 성철 스님이십니다. 성철 스님의 은사스님은 역시 잘 아시는 동산혜일 스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동산혜일 스님의 은사 스님이 누구이신지 아십니까? 바로 용성진종 스님이십니다. 용성 스님 문도로 따지면 저는 증손자인 셈입니다. 큰스님들 계시던 도량에 와서 여러분을 뵙게 되니 저로서는 이 법석이 어른스님들에  대한 소중함을 새기는 자리입니다. 

세 분의 어른 중에서도 용성진종 스님께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우신 분입니다. 스님은 1919년 3월1일 대한독립 만세를 선언하는 그 자리에 참여하시고 그곳에서 체포되셔서 만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활을 하시게 됩니다. 당시 동산혜일 스님께서 올라가셔서 3년 동안 시봉하신 역사도 있습니다. 

스님께서 징역을 살고 나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경전 번역입니다. 당신이 감방에 있을 때 방에는 책이 두 권 있었다고 합니다. 한 권은 다 떨어져서 너덜너덜한데 한쪽 책은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더라는 겁니다. 어떤 책인가 하고 보았더니 다 떨어진 것은 한글로 번역된 성경책이었습니다. 반면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은 한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책을 펼쳐보지 않은 모습에 충격을 받으시고 ‘내가 나가면 다른 포교는 다 두더라도 역경을 하겠다’고 원력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역경 사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 시절 국문은 지금 읽기에 다소 난해합니다. 그래서 그 역경서들은 다시 이 시대에 한글 번역으로 재발간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수행과 포교를 이어가셨는데 서울 대각사에 계실 때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스님께서는 그에게 삼귀의계와 오계를 설하며 “너는 한국에 있지 말고 상해로 넘어가서 김구 선생을 찾아가 도우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분이 바로 상해에 가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입니다. 

스님께서는 1940년 음력 2월24일에 해방을 보지 못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내가 떠나거든 상복도 입지 말고 곡도 하지 말고 그냥 ‘육조단경’의 무상게만 염불하고서 다비를 마치라”고 유언 하셨습니다. 그때 세수가 77세, 법랍이 62세셨습니다. 스님의 열반 5년 뒤 광복이 되고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는 한국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귀환길로 임시정부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대각사를  찾아 참배했다고 합니다. 

용성 스님 영정에 인사를 올리며 “스님께서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주시어 나라가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나 큰 역할을 해주셨고 윤봉길 의사를 보내주시어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라며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으면서 스님을 생전에 뵙지 못한 것을 그렇게 슬퍼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이처럼 어른스님들의 일화는 그 이야기를 접하기만 해도 절로 환희심이 납니다. 무엇보다 저희 용성문도는 노스님의 덕으로 당당히 항일 후손의 기백을 가질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동산혜일 스님께서는 출가 전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친척 가운데 용성 스님과 가까운 분이 계셨고 그 분의 소개로 용성 스님을 뵙게 됐습니다. 용성 스님은 학생이던 동산 스님에게 “몸의 병은 의술로 치료할 수 있겠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룰 수 있겠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내왕을 하시다가 금정산 범어사로 출가하시게 되셨습니다. 무엇보다 동산 스님께서는 1927년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정진을 하시던 중 방선 시간에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시고 출가 15년 만에 견성성불(見性成佛) 하셨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성철 스님께서 아직은 속인이실 때입니다. 몸이 아파 요양을 위해 절에 가셨다가 불교잡지를 보게 되고 참선, 견성, 성불, 마음 깨침, 이런 단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정말 화두를 들고 망상 없이 깊은 선정에 빠질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정진하셨는데 42일 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더라고 합니다. 행주좌와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잠들지 않는 한 화두가 깊숙하게, 청정한 마음이 한곳으로 모이는 경지를 경험하신 겁니다. 이 모습을 예사로 보지 않았던 스님의 추천으로 해인사에 가셨고 ‘성철’이라는 법명을 받아 당시 해인사 조실로 계셨던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습니다. 1936년 봄 스님을 모시고 범어사로 내려와 이후 10년 넘게 참선에 매진하시던 중 1940년 29살에 대구 동화사 금당에서 오도송을 읊으시게 됩니다. 

이렇게 용성, 동산, 성철 스님으로 내려오는 항렬도 있고 용성 스님으로부터 자운, 지관 스님 등으로 내려오는 계파도 있습니다. 용성 스님의 제자들을 다 합치면 무려 12개의 맥이 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성철 스님의 상좌로 인연을 갖다 보니까 용성, 동산, 성철 스님으로 내려오는 큰 맥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겠습니다만,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께서도 성철 스님과 인연이 깊으십니다. 경선 스님은 성철 스님께서 성전암 10년 정진 중이실 때 출가하셔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셨고, 1964년 동산 스님께서 입적하시어 문상을 오시는 길에 범어사로 함께 오셔서 계속 범어사에 남게 되시어 이곳에서 다시 출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경선 스님께서는 저를 같은 문도나 다름없이 챙겨주시고, 동산 스님 추모일에도 불러 주십니다. 

백중기도를 맞아 어른스님들의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어른스님들의 삶 자체가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이끌어주는 나침반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려 말의 뛰어난 선승 나옹 스님을 다 아실 겁니다. 나옹 스님께는 누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누님은 틈만 나면 나옹 스님을 찾아가 동생스님을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 공양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누님에게 나옹 스님은 “내 반찬 잘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누님도 경전 읽고, 참선하고 마음공부하며 부처님 공경해서 극락세계 갈 수 있도록 잘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이미 득도하여 도인이 되었고 이렇게 높은 경지에 있다고 세상이 다 말하는데 나 하나 정도는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나는 공부를 안 해도 네 덕에 극락왕생하는 것은 이미 부처님 전에 맡아놓은 일”이라고 이야기 해버렸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누님이 나옹 스님을 찾아갔는데 그날은 나옹 스님이 누님을 기다리지 않고 공양을 들고 있었습니다. 누님은 스님이 공양하는 동안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 말합니다. “스님, 오늘은 이 누나가 배가 고픈데 같이 먹자고 안 하고 혼자만 열심히 드시는가?” 그러자 나옹 스님은 “누님은 동생인 내가 배 부르면 누님도 저절로 배가부른 줄 알잖아요. 그래서 같이 안 먹어도 누님이 배 부를 줄 알고 혼자 먹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냉정하게 대답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누님도 비로소 참회하게 되었고 이후 마음공부를 하셔서 수행자의 반열에 오르셨습니다. 

공수래공수거시인생(空手來空手去是人生)
생종하처래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나는 것은 어디서 나는 것이며 가는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한번 구름이 저 하늘에 이는 것이고,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저 구름이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다. 흰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고, 우리가 태어났다가 떠나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렇지만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서, 그 홀로 있는 그것은 나고 죽음을 따르지 않는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본 글일 겁니다. 저도 전에는 이 시를 나옹 스님의 누님이 지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재 올리고 기도하면서 늘 마음에 담아 두셔야 하는 것은 ‘나에게 한 물건이 있어서 이것은 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는 영원한 홀로 있는 밝은 영성’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의 밝은 것을 꼭 찾으셔야지 우리도 극락왕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일체중생을 마음대로 구제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7월13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에서 봉행된 ‘백중지장기도 및 생전예수재 5재 법회’에서 원택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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