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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심우장과 만해 용운 스님 (끝)

총독부 청사 등지고 일제강점기 거센 파도 속에서도 꼿꼿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 이끌다 투옥
‘사식 받지 말 것’ 등 옥중 투쟁 3대 원칙 최후 일각까지 실천해
후반기 삶 심우장서 보내며 민족독립 염원하다 광복 직전 입적

만해 용운 스님은 55세가 되던 1933년, 지금의 서울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

1944년 6월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두고 만해 한용운 스님(1879~1944)은 파란만장한 삶을 접어야 했다. 구국기도로 인한 과로와 오랜 지병이었던 중풍, 영양실조 등이 그 원인이었다.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이 애도사에서 묘사했듯 만해 스님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화 같았다.

만해 스님은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892년, 14세 때 결혼했지만 4년 후 홀연히 집을 나왔다.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간 스님은 그곳에서 밥을 짓고 땔나무를 하며 불경을 공부했다. 당시 스님이 접한 건 경전뿐만이 아니었다.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 교양서적을 통해 다양한 근대사상에 심취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백담사에서 연곡 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한 스님은 백담사에서 기본교육을 배우고 건봉사 강원에서 수학했다. 두 절은 서울과 일본에 유학생을 많이 파견하는 근대적 교육에 주력했던 사찰로, 근대문물에 목말랐던 만해 스님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특히 건봉사에서 중국 청나라 서계여가 1848년 지어 1850년에 간행한 10권 분량의 세계 지리 책 ‘영환지략(瀛環志略)’을 접하고는 세계 문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느낀 바가 컸던 스님은 넓은 천지를 둘러본 후 스스로의 뜻을 펼쳐보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세상으로 나아갔다. 걸망에 달랑 목탁 하나와 ‘금강경’ 한 권만 담았다.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등을 유랑하면서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뼛 속 깊이 체험했다.

건봉사로 돌아온 만해 스님은 학암 스님에게 ‘화엄경’과 ‘반야경’을 배웠다. 그리고 1908년 5월, 근대문명이 발달한 중심부를 직접 보려는 마음에 일본유학을 감행했다. 조동종대학서 공부하고 각처의 사찰, 공장, 은행 등을 견학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일본서 보고 들은 문명을 민족운동에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만해 스님은 1913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와 함께 ‘불교대전(佛敎大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 잇따른 불교 관련 저술과 강연회를 통해 무기력했던 당시의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3‧1운동은 천도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계획됐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며칠 전, 최린 천도교 도령을 만난 만해 스님은 즉시 함께할 것을 약속하고 불교계 동원을 책임지기로 했다. 하지만 산간지방에 있는 선승들에게 연락을 취하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했고 결국 종로3가  대각사에서 용성 스님의 서명만 받아낼 수 있었다. 

1929년 촬영된 만해 용운 스님 모습. 머리와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하고 얼굴은 초췌하지만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애국지사의 기운이 강하게 풍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스님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작성을 함께 했고 중앙학림의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 3000장을 주고 여러 절에 배포하게 해 만세시위를 독려했다.

3‧1운동 주동자로 지목돼 투옥된 스님의 감옥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일제 형사들은 감옥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가혹한 문초와 살기등등한 고문을 했다. 민족대표 중 서대문감옥에서 가장 주목을 끈 인물은 단연 만해 스님이었다. 만해 스님은 3‧1운동 직후 재판장에서 “내 육신이 죽어 썩어 문드러진다면 정신이나 영혼이나마 영원토록 민족운동을 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받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이라는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정해놓고 최후의 일각까지 실천했다. 입적 날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당당한 독립지사로 살았던 스님의 신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해 스님의 옥중 투쟁 중 1919년 7월10일 검사 신문에 서면으로 답한 ‘조선독립의 서’는 지금까지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밀리에 바깥으로 흘러나온 서면답변서는 자료 없이 쓴 한 편의 논문이었다. 1919년 11월4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 제25호에 전문이 실렸고 일간지 보도를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후 만해 스님은 민족적 자존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대쪽 소신’과 ‘강철 기개’로 일제에 굴하지 않은 스님은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돼준 것이다.

만해 스님은 석방 후 서울을 떠나지 않고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최일선이었고 또한 벼랑 끝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서 활약했다.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신간회 창립 후에는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돼 활약했다. 청년 교육에 나섰고 현대시를 발표하기에 열중했다. 스님이 1926년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한국 근대문학사에 남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다.

스님은 55세가 되던 1933년, 지금의 서울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심우’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에서 유래했다. 소를 사람에 비유해 ‘읽어버린 나를 찾자’는 의미다.

집을 지을 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에 터를 잡으라는 지인들의 권유에도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며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지었다. 집터를 잡을 때 역시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은 만해 스님은 일제강점기 끝 무렵에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꼿꼿했다. 

심우장은 만해 스님의 후반기 삶의 흔적, 일화, 사상적 편린, 고뇌, 좌절, 희망 등이 점철된 곳이었다. 스님은 이곳에서 산문, 시, 소설 등의 문학 작업과 기고문을 집필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 대중 등을 만나고 대화했다. 만해 스님은 어떤 사소한 일도 일제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한평생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만해 스님은 1944년 6월29일 광복을 눈앞에 두고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세연 66세였다. 스님의 동지들은 그의 시신을 화장해 뿌리고 치아만을 묘소에 묻었다고 한다. 스님의 무덤은 망우리 묘지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만해 스님은 66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동안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선의 묘리를 꿰뚫는 선사였고, 방대한 경전을 주제별로 정리한 교학자였으며 죽는 날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탁월한 시인이자 교양잡지 ‘유심’과 ‘불교’를 발행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스님이 입적한 후 심우장은 유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1980년대부터 이곳을 특별한 역사공간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지속됐고 그 결과 2019년 4월, 국가사적지 제550호로 지정됐다.

설악산 백담사는 경내에 동상과 시비를 세워 스님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마을에는 만해학교와 만해문학기념관 등을 조성해 독자 모임, 작가들의 집필 공간과 자료 전시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불교계와 문학계 인사들은 만해상을 제정해 해마다 스님의 정신을 이은 문인들을 골라 시상하고 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불교개혁가였던 만해 스님의 사상과 문학정신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다.

“하늘과 땅을 돌아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옳은 일이라 하면 용감하게 그 일을 하여라. 비록 그 길이 가시밭이라도 참고 가거라.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만해 스님. 스님이 남긴 발자취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굳은 지조와 중생 사랑의 모습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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