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7. 제26칙 계서봉소(鷄棲鳳巢)

“누가 누구에게 법 구한단 말인가”

침묵하는 낙포 한방 먹인 협산
아만심 꺽기 위해 칼날 드러내
입술로 뭐라고 말할라고 치면
칼 끝에 베이고 만다는 것 이해

낙포가 협산을 참문하자, 협산이 말했다. “닭이 봉황새의 둥지에 깃들면 봉황은 닭이 자신과 같은 무리가 아닌 줄 알고 닭을 쫓아내버린다.” 낙포가 말했다. “제가 멀리서 바람처럼 서둘러 찾아뵈었으니, 바라건대 화상께서는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 내 앞에 설법을 구하는 그대도 없고, 설법해주는 노승도 없다. 누가 누구에게 법을 구한단 말인가.” 낙포가 갑자기 할(喝)을 하자, 협산이 말했다. “자,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모름지기 구름 뚫고 나온 달은 동일한 달이건만, 달빛에 드러난 계곡과 산천은 각기 다른 줄을 알아야 한다. 천하 사람들의 혓바닥을 절단할 수는 있어도 어찌 혓바닥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끔 하겠는가.” 낙포가 침묵하자, 협산이 낙포를 한방 먹였다.

낙포원안(洛浦元安)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임제한테 도(道)를 묻고 그 시자가 되었다. 임제는 일찍이 낙포에 대하여 임제 문하의 한 개 화살이라고 찬탄하였다. 후에 낙포는 유행을 마치고 남방의 협산으로 가서 한 암자에 주석하였는데, 일 년이 지나도록 협산선회를 참문하지 않았다. 이에 협산이 한 승을 통하여 편지를 보냈다. 낙포는 편지를 받아보고는 열어보지도 않고 자세를 단정하게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서 다시 편지를 달라고 하자, 심부름으로 온 승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낙포가 그 승을 때려주고 말했다.

“돌아가서 협산화상에게 이 상황을 전하거라.”

그 승이 협산에게 돌아가서 그 상황을 말씀드리자, 협산이 말했다.

“낙포가 만약 편지를 열어보았다면 반드시 사흘 안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만약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그는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낙포가 사흘 후에 협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협산을 보고도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정면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자 협산이 말했다. “닭이 봉황새의 둥지에서 살아간들 결코 봉황이 되지는 못한다. 썩 꺼져라.”

위의 공안은 바로 이 상황에서 벌어진 문답이다. 송골매는 둥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하늘을 날아가려는 의지를 터득하고, 호랑이 새끼는 젖을 떼기도 전에 소를 잡아먹는 기개를 터득한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작략을 갖추고 낙포와 협산의 승패를 여유롭게 지켜보고 탈락과 합격을 결정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는가.

마지막 대목에서 낙포의 할에 대하여 협산은 ‘천하 사람들의 혓바닥을 절단할 수는 있어도 어찌 혓바닥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끔 하겠는가’라고 응수하였다. 그러자 낙포가 묵묵히 생각에 잠겼을 때, 협산이 갑자기 한 방 때려주었다. 이로 인하여 낙포는 협산을 시봉하였다. 스승과 제자의 기연이 계합되는 곳에는 바늘 끝과 겨자씨가 계합되듯이 조금의 빈틈도 없다. 낙포가 꼬리를 내린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행위를 제아무리 능숙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이치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처럼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에 터득한다고 해도 이미 금시(今時)의 분별에 떨어지고 만 꼴이다. 또한 언구를 통해서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남의 머리를 가지고 자기의 머리라고 착각한 경우처럼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비록 석인(石人)이 두 손으로 박수를 치고 목녀(木女)가 소리높이 노래를 부른다고 할지라도 고래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 소식을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협산은 낙포의 아만심을 꺾어주기 위하여 면전에서 그대로 자기의 칼날을 드러내보였다. 그것을 가리켜 금강왕보검이 독로당당(獨露堂堂)하다고 말했는데, 입술로 뭐라고 말할라치면 곧 칼끝에 베이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의 수단으로서 과거‧미래‧지금(去來今)이 따로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낙포와 협산 부자가 의기투합하는 이치는 정작 그것뿐이었을까.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