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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아뜨마바하바’

기자명 현진 스님

자아 뜻하는 ‘아뜨만’과 존재한다는 ‘바하바’ 복합어

초기불교에선 생명·성질 의미
논장서는 개인·인격 뜻하다가
대승불교에서 ‘몸’으로 정착돼

제10 장엄정토분의 마지막 문단에 부처님께서 “수미산처럼 큰 몸을 가진 사람은 그 몸이 크다 하겠느냐”고 묻자 수보리가 크다고 말씀드리며, 여래께서 몸이 아니라 말씀하셨기에 큰 몸이라 이름한다고 그 이유를 밝힌다. ‘A는 여래께서 A가 아니라 말씀하셨기에 A라 한다’라는 전형적인 즉비논리(卽非論理)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문제는 이 구절에서 구마라집 스님은 ‘신(身)’이라 옮기고 현장 스님은 ‘자체(自體)’라 옮긴 단어에 대한 해석이다.

범문은 “아뜨마바하바(ātmabhāva)는 여래께서 바하바(bhāva)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뜨마바하바(ātmabhāva)라고 일컬어진다”로 되어 있고, 이를 구마라집 스님은 “심대(甚大[身]), 불설비신(佛說非身), 시명대신(是名大身)”이라 옮겼으며, 직역 위주인 현장 스님은 “피지자체(彼之自體), 여래설비피체(如來說非彼體), 고명자체(故名自體)”라 옮겼으니 身 혹은 自體에 해당하는 범어는 ‘ātma+bhāva’이다.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본을 기준한 풀이에 따르면 본 구문은 즉비논리의 틀에서 보신(報身)과 법신(法身)을 오가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우선 부처님께서 몸이 수미산(須彌山)만하다면 크다 할 수 있겠느냐고 수보리에게 물었으니, 그 때의 몸은 보신을 말하는 것이다. 보신은 미묘하여 형상이 있으나 지장보살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수승하고도 미묘한 과(果)인 보신상(報身相)마저 그저 상(相)이라 하여 취하지 않는다면 육도만행을 닦아 무엇 하겠는가! 이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 육경(六境)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지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도 같다.

[A­1] 이에 수보리가 ‘매우 큽니다!’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몸이 실체로서 있다는 의미로 답한 것이 아니라, 자칫 회의(懷疑)에 빠질 중생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방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보신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대원을 발하고 대행을 닦게 하여 수승하고도 미묘한 큰 몸을 얻게 해야 진실되고도 헛되지 않음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A­2] 다시 여래의 말씀이라며 몸이 아니라고 한 것은 보신이 아닌 법신(法身)의 시각에서 답변을 드린 것이니, 이는 청정법신의 체(體)를 일컬은 것이다. 법신은 밖으로 커서 두루 온 세계를 포섭하고 안으로 작아 미진에 들어가니 형상이 없고 수량이 없다. 그래서 몸이 아니라 한 것이다. [A­3] 다시 큰 몸이라 한 것은 보신의 이름과 모양에서 말한 것이다. 법신을 증득하면 수승하고 미묘한 보신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범어 ‘ātmabhāva’는 ātman(아뜨만, 自我)과 bhāva(존재하는 것, 眞實)의 복합어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단어의 시기별 의미변화를 살펴보면, 빠알리어로 attabhāva인 초기불교에선 생명, 재생, 성질 등의 의미였고, 논장에서부터 개인 또는 인격을 의미하다가, 대승경전에선 몸[身] 혹은 자기 몸[自身]이라는 의미로 거의 고정되었다고 한다. ‘ātmabhāva’를 구마라집 스님은 身으로 옮기고 현장 스님은 自體로 옮겼다.

그런데 ‘ātman’은 본래 브라만교에서는 절대존재 브라흐만이 중성적 원리인 것과 함께 언급되는 인격적 원리이다. 이는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를 시작으로 불교 이후에 브라만교의 맥을 잇는 힌두교에서도 견지하는 자신들의 절대적인 원리이다.

그래서 ‘ātmabhāva'를 대승경전에서 굳어진 의미인 身으로 옮기는 대신 ‘ātman[아뜨만]'과 'bhāva[존재]'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적용하여 문단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저것 갖춰진 어떤 사람의 몸[kāya]에 아뜨만[ātman]이란 존재[bhāva]가 있어서 수미산만하다면 그 아뜨만이란 존재는 크다 하겠느냐?’ ‘예! 크다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뜨만이란 존재라고 말하는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은 존재도 아니며 존재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아뜨만이란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가 된다. 브라만교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내세우는 아뜨만(ātman, 我)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여 무아(無我, an­ātman)를 설파하며 일어난 것이 불교이고, 무아론(無我論)에 입각한 초기불교의 원형을 다시 살리고자 한 것이 대승불교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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