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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오지호의 ‘아미타후불탱’  : 서역에서 서양으로

기자명 주수완

‘한국적 인상파’의 호소력 짙은 호류지 벽화

불교신자 아님에도 그림 그리는 동안 경건한 마음으로 제작
흔들림 없고 균일한 굵기의 가는 선은 수행의 일환으로 승화 
조선불화 색채 유화로 재현한 것은 한국적 정체성 담기 위함

오지호, ‘아미타후불탱’, 1954년, 광주 원효사, 유화, 191.8×143.8㎝.

근대기 한국 서양화단에 있어 한국적 인상파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오지호(吳之湖, 1905~1982) 화백은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불화 1점을 남기고 있다. 광주 무등산 원효사의 아미타후불탱이다. 그는 1948년부터 광주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마침 광주는 그의 아내였던 지영진의 처가가 있던 곳으로, 그 집안은 상당한 부호였다고 한다. 또한 장인인 지응현 내외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원효사 중창에 단월로 참여하고 있었다. 원효사는 이름에서 짐작되다시피 원효대사의 창건으로 전해지는 유서깊은 사찰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중창불사를 일으키던 참이었다. 

마침 장인내외가 그 불사에 동참했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아미타후불탱의 제작을 사위에게 의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사위였고, 화가였지만, 서양화가에게 불화를 의뢰하다니, 그의 처가나 당시 원효사 주지스님이나 상당히 선구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지호는 불교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향을 사루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이 불화에 대해 ‘독특한 불화’라고 하지만, 유화로 그려진 점만 제외하면 그 기본은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를 바탕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본존 아미타불의 전체적인 인상과 좌우 협시보살의 자태는 호류지 금당벽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서쪽 벽면의 아미타삼존도를 참조했음이 역력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호류지의 아미타 삼존도처럼 삼존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6보살과 4분의 제자, 그리고 좌우에 천녀가 각각 그려진 군상 구도라는 점외에 본존불이 가사를 걸친 모습을 표현하는데 있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으로 묘사한 점, 그리고 두 손을 모두 가슴 높이로 들고 있는 전법륜인이 아니라 왼손을 결가부좌한 두 발 위에 올려놓은 자세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도 호류지 금당의 북쪽 벽면에 그려진 벽화 도상을 보면 승려의 모습이나 그밖의 보살들의 모습을 이 벽화에서도 참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지호는 휘문고보에서 한국 서양화의 선구자였던 고희동에게 미술을 배우면서 서양화에 눈뜨게 되었지만, 막상 고희동이 서양화 작업을 지속하지 않자 대신 나혜석 등에게 감명을 받고 고려미술원에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특히 그곳에서 일본 유학파인 이제창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결국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아마도 그는 유학 중에 이 호류지 금당벽화를 실제로 보았던 것이 아닐까. 특히 호류지 금당벽화는 1948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그가 유학하던 1928~1933년에는 원작을 충분히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전통회화보다 서양화에 경도되어 서양화가로서 출발했던만큼, 그에게는 당시 전통불화였던 조선불화보다는 이 호류지 금당벽화에서의 인상이 더 강렬했을 것 같다. 
 

호류지(법륭사) 금당 북면 동측 벽화 모사도, 일본 나라, 8세기 전반.

호류지 벽화는 조선시대 불화에 비해 확실히 더 감각적이고 보다 사실적인 인체의 묘사를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양식은 저 멀리 인도 아잔타 석굴의 굽타시대 벽화와도 비교되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 벽화가 그려졌던 7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이 벽화 양식은 전통양식이 아니라 새로운 수입 화풍이었던 것이다. 오지호의 아미타후불탱은 이 서역양식에 대한 서양미술의 재해석인 셈이다. 

불화는 꼭 지금과 같은 전통적인 도구로 그려져야만 할까? 사실상 그런 제약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전통기법으로 불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예를 들어 흔들리지 않고 선을 균일한 굵기로 가늘게 뽑아내는 것은 일종의 수행 일환으로 승화되어 버렸다. 때문에 이를 단순한 테크닉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선(線)이 선(禪)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유화는 수행이 될 수 없을까?

앞서 오지호 화백 본인도 이 아미타후불탱을 그리기 위해 향을 사루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다고 하는 것처럼, 서양화 작업도 수행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사치오도, 지오토도, 그리고 미켈란젤로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교미술의 작업 과정이 너무 종교성만 강조하는 동안 자칫 미술 본연의 호소력을 잃어갈 수 있다. 어쩌면 뛰어난 예술가들의 창의성과 파격을 불교미술은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불교미술이 발전해 나가는데 자양분으로 삼아왔다. 김홍도의 서양화풍 후불탱이나 오지호의 서양화 후불탱이나 모두 전통을 전통이게끔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에게 되묻는 듯하다. 

오지호는 첫 스승인 고희동이 서양화를 포기하고 전통회화로 회귀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무조건 서양이나 일본의 스타일을 따르는 것도 경계했다. 그는 갈수록 한국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아마도 ‘한국적 인상파’라는 그에 대한 평가는 그러한 고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불화 제작을 의뢰 받았을 때 무엇보다 이 호류지 금당벽화를 모델로 삼은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서방화풍으로 그려진 그림, 그러나 그것을 그린 작가는 고구려의 담징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이 어디인가를 고민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호류지 벽화를 참조하면서도 채색에 있어서는 조선불화의 색채를 유화로 재현하고자 한 것 역시 그러한 접점을 찾으려한 결과로 생각된다.

참고로 오지호 작가와 원효사와의 인연은 그의 아드님인 오승우 화백으로 이어져 그의 신중탱과 칠성탱이 원효사에 전한다. 문화재 등록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 이후 이 불화가 전시관이 아닌 실제 예불용으로 법당에 걸린 서양화로서 계속 기록되기를 바란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46호 / 2020년 7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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