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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엄청난 공양의 초라한 복덕

기자명 현진 스님

칠보공덕은 알음알이…게송공덕은 지혜

칠보공양 공덕은 해탈의 간접요인
사구게송 한 수는 직접적인 요인
가르침까지 온전해야 배움이 완성

제8 의법출생분에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그것으로 여래께 보시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복덕이 많겠느냐?”라고 묻자 당연히 수보리는 많을 것이라 답한다. 수보리는 아울러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오가는 즉비논리에 ‘복덕’을 대입하여 언급함으로써 많다고 답한 자신의 답변이 무엇이 많다거나 적다는 유무(有無)의 상대적인 논리에 빠져있지는 않다는 것까지 말씀드린다. 그러자 부처님께선 그렇게 얻을 복덕보다 지금 당신이 일러준 가르침에서 사구게송 한 수만이라도 온전히 배워 알아서 남에게 일러줄 수 있다면 그 복덕이 훨씬 크다고 말씀하신다.

제11 무위복승분에도 제8분과 동일한 유형의 내용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라는 숫자만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제11분에서는 많음의 강도를 더하기를, 인도인들이 많은 숫자를 거론할 때 항상 등장하는 강가강의 모래알 숫자를 언급한다. 그저 강가강 하나의 모래알 숫자만이라도 엄청난데 그 모래알 하나를 하나의 세계로 여기면 모래알 하나 안에 다시 하나씩의 강가강이 있을 테니, 그 모든 강가강에 있는 모래알 숫자만큼의 세계, 그렇게 무한곱절로 늘어난 숫자의 세계에 칠보를 채워놓고 여래께서 오실 때마다 빠짐없이 공양할 경우라고 하니, 우선 그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는 얼마만큼 큰 세계인가? 불교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는 하나의 수미세계(須彌世界)이다. 즉, 하나의 거대한 수미산을 중심으로 일곱 겹의 산맥과 그 사이사이 여덟 길의 바다인 칠산팔해(七山八海)가 펼쳐져있고, 수미산 중턱으로 해와 달이 뜨고 지며, 수미산 정상 위쪽으로는 색계와 무색계의 세계가 층층이 펼쳐져있다. 이 하나의 수미세계가 천 개 모이면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불리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중천세계(中千世界), 그리고 중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대천세계(大千世界) 혹은 삼천대천세계라 불린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는 수미세계가 10억 개 모인 우주이다. 이 삼천대천세계가 한 부처님께서 맡으셔서 교화하는 범위인데, 그 넓은 세계를 칠보(七寶)로 가득 채워놓고 여래께 공양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도 모자라 강가강 모래알 하나하나만큼의 더 넓은 세계영역에 칠보를 채워놓고 여래께 공양해도 경전의 사구게송 하나 일러주는 복덕만 못하다 하였으니, 언뜻 들어서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라며 고개를 갸웃할만하다. 사구게송(四句偈頌)이 가르침의 온전한 내용이 오롯이 담긴 완벽한 문장이란 것은 앞서 살펴보았다. ‘금강경’ 전체의 내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온전한 사구게송 한 수가 요긴한 것은 마치 팔만사천의 대장경 전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소의경전 한 권이 요긴한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삼천대천세계나 그보다 더 넓은 항하사 모래알만큼의 세계영역에 칠보를 채워놓고 공양 올리는 공덕보다 사구게송 한 수를 익히고 남에게 일러줘서 이루는 공덕이 더 큰 까닭은 무엇인가? 칠보공양의 공덕은 아무리 커도 해탈로 나아가는 간접적 원인일 뿐인데 사구게송 한 수는 직접적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칠보공덕이 알음알이라면 게송공덕은 지혜인 셈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게송 한 수가 바로 지혜는 되지 못할 것이니, 게송이 도피안의 지혜가 되는 방법이 바로 수지독송 내지 위타인설이다.

한 권의 소의경전처럼 한 수의 사구게송을 받아서[受] 지니고[持] 독송(讀誦)함으로써 철저히 이해하고[究竟通利] 그대로 마음에 새긴[如理作意] 후에 남에게 널리 일러주어[宣說] 열어 보이기[開示]까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이는 ‘수지'부터 ‘여리작의'까지 올바른 지혜가 갖추어야 할 내적인 요소는 물론 ‘위타선설개시'라는 외적인 요소까지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효학반(斅學半, 가르침이 배움의 절반)이라 하였듯이, 학생으로 익힘에서 끝나지 않고 선생으로서의 가르침까지 온전히 갖추어야 배움이 완성되는 것처럼, ‘금강경’의 ‘수지독송위타인설’은 올바른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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