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하 까사빠 존자를 가르치다
28. 마하 까사빠 존자를 가르치다
  • 이필원 교수
  • 승인 2020.07.28 09:47
  • 호수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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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것은 스승된 자의 책무

두타제일 마하 까사빠 존자도
비구 수행승 교화 어려움 토로
스승 책무는 자비심 갖추는 것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게 신통

마하 까사빠(Mahākassapa)존자는 부처님 입멸 후 제1차 결집을 주도한 인물이다. 두타제일로 칭송받던 존자는 사리뿟다존자와 마하목갈라나존자가 열반한 후, 명실공히 승단의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런 만큼 마하 까사빠 존자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선종사에 등장한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대나무숲에 머물고 계실 때, 마하 까사빠 존자가 다가와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붓다] “까사빠여, 비구 수행승들을 가르치고, 법문하라. 나나 그대가 비구 수행승들을 위해 가르치고, 법문해야 한다.”
[마하 까사빠] “세존이시여, 요즈음 비구들에게는 훈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에게는 훈계하기 어렵게 만드는 바탕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을성이 없으며 공손하게 가르침을 받들지도 않습니다.”(SN.II, p.208)

교화라고 하면, 가르침에 입문하기 전이나 입문했더라도 아직 성숙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마하 까사빠 존자와 같은 분도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교화의 여지가 열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까사빠 존자가 수행이 덜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 교화에 대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까사빠 존자에게 비구 수행승들을 가르치고 법문할 것을 말씀했는데, 존자는 요즘 비구들은 훈계하기 어렵다며, 그 이유로 참을성도 없고 공손히 가르침도 받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기원 전 1700년 수메르인이 적었다는 점토판 내용이나, 한비자가 말한 “요즘 덜 떨어진 아이가 있어(중략)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今有不才之子(중략) 師長敎之弗爲變)”(오두편)는 내용을 연상케 한다. 일견 존자의 말도 타당한 듯하다. 사실 배움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스승을 믿고 공경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앙굿따라 니까야’의 ‘뿐니야의 경(Puṇṇiyasutta)’에서 가르침을 설하게 될 인연으로서 여덟 가지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가르침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까사빠 존자의 말씀은 사실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붓다] “까사빠여, ‘청정한 삶을 사는 자는 청정한 삶을 해치는 것에 의해 해침을 받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자는 청정한 삶을 파괴하는 것에 의해 파괴당한다’고 한다면, 이와 같이 ‘청정한 삶을 사는 이는 청정한 삶을 해치는 것에 의해 해침을 받고, 청정한 삶을 사는 이는 청정한 삶을 파괴하는 것에 의해 파괴당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도 정각 직후, 당신이 깨달은 법은 심오하여 알기 어렵기에 설법하는 것에 주저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그 가르침을 받아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 있기에 기꺼이 교화의 길을 나선 것이다. 까사빠 존자에게 하신 말씀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청정한 삶을 해치는 것이 무엇인지, 청정한 삶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스승 된 자의 마땅한 책무인 것이다. 제자에게는 스승에게 묻고 가르침을 청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면, 스승에게는 제자를 격려하거나 다양한 방편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의 책무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고, 스승의 책무는 자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스승의 자비심만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자를 듣게 만든 것이 바로 가르침의 신통[기적]이 아닐까.

수행의 완성을 이룬 까사빠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설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되짚어 주신 것이다. 교화란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의 이익을 위해 나아가는 행위라는 것을.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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