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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1)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⑤ - (2) ‘중고’시기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상

지배체제 확립‧군사조직 정비‧외교부서 확대 등 정치개혁 꾸준히 진행

지증왕 때부터 6부 지배체제 변화…법흥왕 때 ‘대왕’ 칭호 사용
병부 설치해 6부 소속 군대 통합…영역 확장 및 왕권 강화 기여
수‧당과 외교 중요성 대두 …김춘추 외교권 장악 후 크게 확대 

국보 264호 포항 냉수리 신라비.

신라는 22대 지증왕대(500~514)부터 본격적으로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21대 소지마립간의 6촌재종아우로 정변을 통해 64세의 늦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정치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즉위 4년(503) 10월에 국호를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자신 외에는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지배체제를 안정시켰다. 그보다 한 달 앞서 세워진 ‘영일 냉수리비’는 7명의 6부 대표들이 모여 재산분쟁 문제를 함께 의논해 결정하고, 공동 명의로 시행을 명령하는 사실을 기록한 일종의 공문서 성격의 내용을 새긴 것인데, 주목되는 사실은 회의에 참석한 6부의 대표(실제 참석자는 4부의 대표)들이 모두 왕을 칭하여 ‘7왕(七王)’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지배체제가 6부의 대표 공동으로 운영되는 일종의 과두체제(寡頭體制), 또는 공화체제(共和體制)였음을 의미하는데, 한 달 뒤 왕호의 개혁조치로 지증왕의 권위가 높아지게 되면서 여타 대표들과는 차별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지증왕대부터 6부 사이에도 세력의 차등이 생기어 탁부(啄部)와 사탁부(沙啄部)의 2부가 주도하는 체제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증왕이 세상을 떠난 뒤 법흥왕이 된 큰 아들 모즉지(牟卽智,原宗)는 탁부, 작은 아들 사부지(徙夫智, 立宗)는 갈문왕으로 사탁부 소속이 되어 법흥왕대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탁부와 사탁부가 주도하는 6부 공동지배의 기본적인 체제는 지증왕의 아들인 23대 법흥왕대(514~540) 전반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법흥왕 11년(524) 정월 15일에 세워진 ‘울진 봉평비’에 의하면 6부 가운데 4부의 대표 14인이 모여 회의하고 있었는데, 법흥왕도 ‘탁부모즉지매금왕(啄部牟卽智寐錦王)’으로 표기되었던 바에 따르면 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대표들과 같이 자기 소속부 이름을 관칭함으로써 국왕이라는 신분 이전에 특정 부의 대표라는 성격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6부 대표들의 인명표기 방식에서 부명・인명・관등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도 지증왕 4년 9월의 ‘영일 냉수리비’에서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14인 대표의 열거 순서에서 ‘냉수리비’는 소속부별로 분류되었던 데 비하여, ‘봉평비’는 부별로 분류되지 않고 관등의 순서를 우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일원적인 관등체제의 시행을 통하여 6부공동의 지배체제를 극복하고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 수립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앞서 법흥왕 7년(520) 정월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제(百官公服制)를 제정한 조치였다. 율령과 공복제도의 시행, 그리고 그에 기반한 17등 관등제의 정비는 실로 지배체제 정비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법흥왕 18년(531) 4월에는 이찬 철부(哲夫)로 상대등(上大等)을 삼아 국사를 총리케 하였는데, 율령 반포에 이은 지배체제 정비의 두 번째 큰 조치였다. 상대등의 설치로 이제 국왕은 6부대표회의체 대표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지위로 상승하고, 6부체제를 대표하는 역할은 신설된 상대등이 대리하게 하는 조치였다. 법흥왕 22년(535) 8월에 새겨진 ‘천전리서석’ 을묘명에 의하면 국왕은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으로 칭해지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상대등 설치 이전인 법흥왕 11년(524) ‘봉평비’에서의 ‘탁부모즉지매금왕’의 칭호에 비하면 실로 커다란 변화였다. 탁부라는 소속부 표기는 없어지고, 모즉지(또는 募秦)라는 인명은 성법흥이라는 왕명으로 바뀌고, 매금왕(또는 麻立干)이라는 왕호는 대왕, 즉 왕중의 왕, 또는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의 칭호로 바뀌었다.

한편 왕권 강화에 수반하여 구체적인 지배체제의 정비 작업은 5세기초 지증왕대부터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지증왕은 국명제정과 왕호사용 이외에도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즉위 3년(502) 순장(殉葬) 금지, 농사 장려와 우경(牛耕) 실시, 5년(504) 상복법(喪服法) 실시, 6년(505) 주군제(州郡制) 실시, 10년(509) 동시(東市) 설치 등이 대표적 조치였다. 4〜5세기 철기문화의 보급으로 인한 농업과 교역이 크게 발전되고, 그에 상응한 친족공동체의 분화가 이루어진 결과였다. 다음 법흥왕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기에 앞서 즉위 4년(517)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는데, 6부 소속 군대를 통합 관리할 필요성에서 중앙 행정관서로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관서였다. 그리고 법흥왕대는 군사조직을 정비하는 작업이 뒤를 이었는데, 즉위 10년(523)에는 감사지(監舍知), 11년(524)에는 군사당주(軍師幢主) 등의 군관직을 설치하였다. 지증왕 6년(505) 지방의 군정장관인 군주(軍主)를 설립한 이래 제2기의 군제 정비였다.
 

국보242호 울진봉평신라비.

법흥왕대에 시작된 군사조직의 정비는 다음 진흥왕대 대외적인 영역확장 사업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로서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모후인 사도부인(思道夫人)의 섭정과 병부령 이사부(異斯夫)의 보필을 받으며 법흥왕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특히 군사조직의 정비와 대외적 영역 확장 사업은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다. 진흥왕은 즉위 2년(541)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일을 관장케 하였다. 그리고 5년(544)에는 병부령 1인을 증원하여 2인이 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각각 분담하였을 것이라는 해석과 6부의 중심세력인 탁부와 사탁부 2부체제의 결과라는 해석으로 나뉘어 있다. 어떻든 군사조직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고, 뒷날 삼국통일전쟁에서 출정을 앞둔 시점인 태종무열왕 6년(659) 다시 1인을 증치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 신라의 중앙행정관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장관인 영(令)이 2~3인의 복수인 점이었는데, 중요한 문제는 합의결정하는 6부회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진흥왕 5년 병부령 1인이 증원되면서 군사조직의 정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우선 같은 해에 신라 최대의 군단인 대당(大幢)이 설치되고, 또한 음리화정(音里火停)을 비롯한 10정(停), 즉 지방주재 군단의 전신이 마련되었다. 

이어 진흥왕 13년(552)에는 6정의 제2 군단인 상주정(上州停, 뒤에 貴幢으로 개칭)이 창설됨으로써 중앙귀족의 사병군단이 통합되는 것과 동시에 지방군단의 핵심으로 상주정이 만들어졌고, 그와 같은 종류의 한산정(漢山停, 本新州停)은 진흥왕 29년(568)에 만들어졌다. 

또한 군관직으로는 진흥왕 10년(549)에 2등 군관직인 대관대감(大官大監)이 창설되고, 진흥왕 23년(562)에는 3등 군관직인 제감(弟監)과 5등 군관직인 소감(少監)이 창설되어 군관직도 거의 완비되었다. 진흥왕은 군사조직을 정비하는 이외에 병부령 1인을 증원하는 진흥왕 5년(544)에 사정부(司正府)를 설치하고 경(卿) 2인을 두었고, 26년(565)에 품주(稟主)를 설치하고 전대등(典大等)을 두어 사법(司法)과 재정(財政) 분야를 각각 담당케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군사조직의 정비를 뒷받침하는 의의를 가진 것이다. 진흥왕 15년(554) 고구려군과 백제군을 축출하여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23년(562) 대가야를 평정하여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것은 이러한 군사조직의 정비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진흥왕대 일관되게 추진한 군사조직 정비와 영역확장 사업은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왕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진흥왕대 병부령 이사부의 눈부신 활약에 비해서 귀족회의를 대표하는 상대등의 존재가 거의 들어나지 못한 것은 군사조직 정비를 위주로 한 왕권강화의 정책과 관련된 것이다. 진흥왕은 그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왕위의 안정적인 계승을 위하여 일찍이 27년(566) 맏아들 동륜(銅輪)을 왕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6년만인 33년(572)에 왕태자가 사망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혼란이 야기되었다. 37년(576) 진흥왕이 43세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사륜(舍輪, 또는 金輪)이 왕위를 계승하여 25대 진지왕(576〜579)이 되었다. 진지왕은 즉위년(576) 명신인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보필을 받았으나, 거칠부가 곧 사망함으로써 왕권의 위기를 맞았다. 결국 즉위한지 4년만에 정치의 문란과 음란 행위라는 죄명으로 귀족들에 의해 폐위당함으로써 진흥왕의 정책은 순탄하게 계승되지 못하였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왕위는 동륜태자 아들인 백정(白淨)에게 이어져 26대 진평왕(579~632)이 되었다. 진평왕은 54년의 장기간 재위하면서 왕권 안정과 지배체제 정비를 추진하여 ‘중고’ 시기 사실상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진평왕의 전반부는 상대등 노리부(弩里夫)와 병부령 후직(后稷)의 보필을 받으면서 중앙 행정관서의 정비에 노력하였고, 후반기에는 역시 상대등 수을부(首乙夫), 특히 진지왕의 아들이자 뒷날 태종무열왕의 아버지가 되는 용수(龍樹, 龍春)의 보좌를 받아 왕실의 관리와 왕궁의 시위를 담당하는 관서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다. 

진평왕은 먼저 초반인 3년(581) 관리의 인사담당 관서로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했는데 이 행정관서는 통일 뒤인 신문왕 2년(682)에 크게 강화되었다. 이어 5년(583) 선박 담당의 관서로 선부(船府)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각 1인을 두었다. 원래 대감과 제감은 병부에 속했던 것인데, 문무왕 18년(678)에 분리되었다. 또한 6년(584) 조부(調府)에 장관인 영(令) 1인을 두어 조세를 관장케 하였는데, 원래 재정 전반을 담당하던 품주에서 조세에 관한 업무만을 분리해낸 관서였다. 그리고 같은 해 승부(乘府)에 장관인 영(令) 1인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어 8년(586)에는 교육과 의례 등을 담당하는 행정관서로 예부(禮部)에 장관인 영(令) 1인을 두었는데, 특히 예부는 뒷날 진덕여왕 5년(651)에 그 조직이 크게 강화되었다. 

13년(591)에는 외국 사신의 영접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서로 영객부(領客府)에 장관인 영(令) 2인을 두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본기와 다르게 “영객부의 본명이 왜전(倭典)이었는데, 진평왕 43년(621)에 영객전(領客典)으로 고쳤으며, 장관인 영(令) 2인은 진덕여왕 5년(651)에 두었다”고 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어느 기록이 옳은지 쉽게 판정할 수는 없으나, 진평왕대부터 특히 중국 수(隋)・당(唐)과의 외교 중요성이 커지면서 왜전을 영객전로 바꾸고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서로 왜전을 별도 설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당외교를 전담하였던 김춘추가 외교권을 장악한 뒤인 진덕여왕 5년(651)에 크게 정비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진평왕 후반기의 왕궁과 왕실 관련 기구의 정비는 ‘중대’ 왕통을 연 용수-춘추 부자의 정권 장악 과정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에 살펴보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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