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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최규석의 ‘송곳’ - 하

기자명 유응오

법계연기가 우리 살아가는 사회

중중무진 서사구조 ‘압권’
신자유주의로 양극화 강화
불교의 평등정신 되새겨야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웹툰이든 완성도 높은 서사작품은 하나의 화엄세계와 같다. 점과 점이 어우러져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어우러져 면을 이루듯, 완성도 높은 서사작품은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사건을 만들고,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완성도 높은 서사작품은 중중무진의 법계연기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임을 깨닫게 한다. 최규석의 ‘송곳’도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국의 노동현실을 고발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송곳’은 웹툰 인기의 여파로 방송사에서 연속극으로 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대중성을 지녔는데, 이 대중성은 극적 구성과 입체적인 인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찰의 불화에는 석가모니불만 주인공인 게 아니라 삼존불, 나아가서는 보살님과 나한님, 호법신장님까지도 모두 주인공이듯이, ‘송곳’의 등장인물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이수인의 상관인 북어는 상관인 가스통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면서 자신의 어머니뻘 되는 판매원들에게는 욕설을 하고 구타를 하는 이중인격자이다. 하지만 영어에 능통한 이수인과 달리 점장과 일상적인 대화조차 못 나누는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기도 한다.

노조를 탄압하는 프랑스인인 가스통 점장도 한국에 발령됐을 땐 윤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부하 직원이 유통기한을 속여 팔다가 영업정지 3개월 처분을 받고도 접대로 벌금 50만원으로 감형 받는 일을 겪고 가스통은 한국은 법을 안 지켜도 되고, 문제가 되도 뇌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강민 주임은 동료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아서 이수인을 제치고 노조지부장이 된다. 하지만 약자를 멸시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송곳’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단선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이 작품은 한국사회의 노동쟁의를 제재로 다룬 작품인 만큼 사회적 강자인 회사 측과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측의 중심인물이 대립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회사 측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악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 측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선한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인물의 성격도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한 인물들로 그려지던 노조원들이 송 부장을 상대로 광기어린 행패를 부리는 장면이나 이수인이 노조원과 송 부장 사이에서 고민 끝에 송 부장을 등지는 장면은 작품 속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 있다.

작품 제목인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을 비유한 것인데, 설령 승패의 결과가 불확실할지라도 불평등한 노동환경에 항거할 수 있는 양심적인 인물을 의미한다.

‘송곳’은 자본가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묘사하는데, 이러한 갈등을 초래한 것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를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뜻 듣기에는 일리가 있지만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경제 대국과 경제 후발국의 양극화는 물론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빈부 격차, 소득 격차가 심화될 따름이다. 이러한 사회 문제는 경제적 가치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 말살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열반경’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정하고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다 부처님처럼 깨달을 수 있는 까닭에 차별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2600여년 전의 가르침임에도 신자유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대중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수승한 지 새삼 깨닫게 된다.

유응오 소설가 arche442@hanmail.net

 

[1547호 / 2020년 7월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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