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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엔 청도 운문사를

봄엔 꽃이 있어 설렜고 여름엔 비가 잦아 행복하다. 유난히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철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좋은 걸 어떡하나. 동시에 비를 끔찍하게 아꼈다. 나에게 ‘비 오는 날은 파전에 막걸리’란 말을 했다가 더러 머쓱해진 사람도 있을 정도다. 적어도 비 오는 날만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만의 방식으로 비와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와인 한 잔까지 거부하는 것은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다만 혼자여야 한다는 조건은 언제나 변함없는 불문율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순간’ 카타르시스와 힐링의 파도가 밀려온다. 마치 수준 높은 고급 쾌락을 맛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비가 나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언젠가부터 비 오는 날의 청도 운문사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절은 사시사철 안 좋을 때가 없지만 눈 올 때 가보고 싶은 절이 있는가 하면, 비 올 때 더 찾고 싶은 절도 있다. 지난 목요일이었다.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까지 추적거렸다. 불현듯 미뤄놨던 숙제를 해치우고야 말겠다는 객기가 발동했다. 스마트폰 앱을 뒤적여 동대구역행 고속열차를 예약했다. 다행히 비는 갑작스러운 대구행을 취소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강우량을 계속 유지했다. 비야 내려라, 너무 많이 내리지는 말고. 대구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 가이드를 부탁했다. 신심 깊은 불자인 친구 부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고속열차는 기적을 울릴 여유도 없다는 듯이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낭만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쾌적한 속도감은 부정하기 힘든 매력이었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물과 노닥거리는 사이에 벌써 동대구역이다. 1시간 47분. 놀라운 속도였다. 저만치서 친구 부부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대구역에서 경산을 거쳐 청도 운문사까지 1시간 남짓. 드디어 비 오는 날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운문사에 도착했다. 청·도·운·문·사! 왠지 발음만 들어도 정갈하고 운치 있는 고즈넉한 사찰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산사는 선정에 든 수행자처럼 가끔 묵직한 미동(微動)만 있을 뿐 다른 사소한 움직임들은 전무(全無)했다.

산속이라 그런지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사방을 둘러본다. 운문사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호거산(虎踞山) 봉우리들이 제법 높았다. 봉우리 사이로 구름(雲)이 모여들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갖가지 모양의 문(門)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이문(不二門)도 있었고 해탈문(解脫門)도 보였으며 지옥문(地獄門)도 나타났다. 설마 그래서 운문사(雲門寺)일까. 불가사의한 경험이었다.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웅보전에 들러 삼배를 올린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앙증맞게 서 있는 작압전(鵲鴨殿)과 마주쳤다. 까치가 울면서 쪼고 있던 땅에 당우(堂宇)를 세웠다는 유래가 흥미로웠다. 그 맞은편 야트막한 담벼락엔 ‘출입금지’란 팻말과 함께 비에 젖은 능소화 몇 점이 우리 일행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담장 너머가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았다. 빗물에 불은 계곡물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귀경길을 서둘러야 했다. 비가 좋아 막무가내로 감행한 당일치기 대구여행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눈(雪)은 ‘오는’ 것이지만 비(雨)는 무조건 ‘내리는’ 것이다. 어디론가 무작정 걷고 싶다는 말도 눈보다는 비 오는 날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끝까지 우기고 싶은 심정이다. 당연히 마지못해 오는 눈보다는 오지 말라고 해도 내리는 비를 더 좋아한다. 눈은 쌓이지만 비는 씻겨준다. 친구 부부와 헤어질 시간, 친구 부인은 기어코 지역특산품인 황남빵 두 봉지를 내 손에 들려주고 나서야 돌아섰다. 비 오는 날엔 청도 운문사다. 한 번 가보시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48호 / 2020년 8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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